'박노해' 작가의 '걷는독서'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등에 진 짐이 무거울수록 깊은 발자국이 새겨진다.'
오래 만난 친구가 말었다. 어쩐지 너는 항상 그자리일 것 같다. 좋은 말이지만 옳은 만은 아니다.
'확신'이라는 것이 '오만'에 가깝다. 그것을 삶을 통해 배웠다. 어릴 때는 너무 쉽게 '확신'이라는 것을 하고 살았다. 그것이 '자신감'으로 연결될 때가 있다. 겁없이 행동할 수 있는 때가 있다. 다만 그것은 '무지'와 '행운'이 만난 기가막힌 우연으로 얻게 된 환상이다.
삶을 경험할수록 '확신'보다 '불확실'이라는 것에 공감한다. 20대 초반 유학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시는 한국에 안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에 있다.
'내가 여기서 뭘하고 있지.'
이 순간도 사실상 멈춰진 듯 흘러간다.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흐르는 물은 하나의 '선'처럼 보인다. 고로 끊임없이 달라지고 흘러가는 와중에도 마치 멈춰진 것처럼 보일 뿐이다.
삶을 들여다보면 '생노병사'든, '희노애락'이든, 그게 어떤 방식이든 출렁인다. 그 어느 순간을 편집해보면 삶은 희극일수도, 비극일수도 있다. 다만. 왜 그래야 하는가.
달려가는 말은 '머리'도, '꼬리'도, '다리'도 모두 다르게 부르고 있지만 그것이 달려갈 때, 우리는 '말'이 달려간다고 부르지 않나. 삶의 한 부분을 떼어 놓고 '그것'이라 명명하지 말고 '삶'이 흘러가고 있구나, 하면 사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두 한 줄기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모두 결코 가만 않는다는 것이다. 이 글의 도입을 읽을 때보다, 지금의 문장에서 달도, 태양도, 지구도 모두 조금씩은 움직였다. 완전히 그 모양을 달리한 두 개의 우주만큼 차이가 벌어졌으니, 사실 똑같다는 건 없다.
누군가 말하기를 '삶'이 고독하다면 '남'들이 공감 못할 깊이를 경험했기 때문이란다. 물어 볼 곳이 없고, 말할 곳이 없다는 것은 어쩌면 그 누구도 비슷한 사유를 해본적 없어 그럴 것이다.
혼자 짊어지고 간 그 무게 만큼 깊이 발자국이 새겨진다니, 더욱 꼭꼭 즈려 밟고 누군가는 조금 더 쉽게 방향을 찾을 수 있게 기록을 남겨 둬야지.
결국 나의 묵직한 삶의 무게가 여러 사람의 길라잡이가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