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불평을 받아주느라 해를 입지 마라.'
'근묵자흑'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 악한 사람을 가까이 하면 그 버릇에 물들기 쉬워진다. 보통의 사건은 '사건 자체'보다 받아 들이는 '태도'에 있다. 원효대사의 원효대사의 해골물은 맛이 변한 것이 아니라, 해석이 변했을 뿐이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오른쪽에서 보면 그것은 왼쪽으로 보이고, 왼쪽에서 보면 그것은 오른쪽으로 보인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 없다. 개미 같은 미물이건, 태산 같은 괴물이건, 그것을 오른쪽에 놓고 보면 오른쪽으로 보이고, 왼쪽으로 놓고 보면 왼쪽으로 보인다.
우주 전체에 오른쪽과 왼쪽이란 없다. 위와 아래도 없다. 높고 낮음도 없다. 하물며 오른쪽에 있다는 것도 4만 300km만 더 밀면 한바퀴를 돌아 다시 왼쪽에 같다 붙는다.
고로 받아들이는 방식의 문제다. '재수 옴 붙었다'. 도무지 어떤 일을 하려는데, 안 좋은 일만 일어난다면 왜 그런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알고 봤더니 '옴'이라는 것은 피부 기생충 감염질환이란다. 전염성이 아주 강한 이 피부질환은 기생충을 나눠 가져 준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대체로 상대도 어딘가에서 묻어왔고, 나도 그에게서 묻었으며, 이는 다른 누군가에게 옮겨 갈 것이다. 그 '옴'이라는 녀석은 결국 '부정적인 생각'을 말한다. 말 끝마다 모두 부정적인 사람이 있다.
부정적인 것은 '나쁘게 생각하다'와 다르다. 부정적인 것은 '否(아닐 부)'에, '定(정할 정)'을 사용한다. 정해진 바가 없다. 스스로 좌로 우로 왔다갔다 거리니, 세상 만물이 정해진 바 없이 왜곡된다. 좋은 일도 나쁜 일로 여기고, 나쁜 일도 좋은 일이라 여기니, 그것이 바로 부정적인 것이다.
이것의 반의어가 '긍정'이다. '긍정의 긍(肯)은 '즐기다, 옳게 여기다. 인정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글자다. 스스로를 바르게 정하고 굳게 철학을 딛고 서서 좌와 우를 명확하게 정한다. 그것과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정하고 옳게 여기고 받아 들인다. 그것을 정확하게 인지하니 모두 즐길 수 있다.
불교의 무아 사상이나, 플라톤의 이데아론,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 모두 모든 것은 시체가 없는 '공'하고, '이데아의 그림자'일 뿐이며, 현실의 본질이 허상이라고 말한다. 고로 시간이나 공간, 기억, 관계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한낮에 피어 오르는 아지랑이 같은 것이다. 그것이 분명 눈앞에서 피어 오르지만, 언제 사라진지는 분명치 않게 반드시 사라진다.
눈앞에 놓인 그것들이 모두 허상임을 알고 있으면 모든 즐길 수 있다. 우리가 돈을 주고 공포 영화를 보는 까닭은 그것이 허상임을 알기 때문이다. 스크린 앞에서 칼을 들고 튀어 나오는 강도가 모두 RGB 색을 구현하는 픽셀의 조합임을 알면, 그 디스플레이 뒤에서 날카로운 이빨을 들어내는 맹수도 하나도 무서울 것이 없다. 그제서야 그 환영을 즐길 수 있는 자세가 된다.
고로 모든 것은 '사람 문제'이지, '상황'이나 '대상'이 문제가 아니다. 고로 누군가를 만나고 재수 옴 붙었다는 생각이 마주 생긴다면 내가 '저사람의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배웠구나'를 떠올리는 편이 낫다.
투자계에 이런 말이 있다. 긍정적인 투자자는 부자가 되고 부정적인 투자자는 스타가 된다. 원래 뭐든 '성공'보다는 '실패' 확률이 높다. 고로 '저것은 실패한다'라고 예언하면 반드시 높은 확률로 맞는다. 사람들은 이런 '부정적인 사람의 예언'을 신봉하곤 하는데, 결국 중요한 것은 '떡'은 긍정한 사람에게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