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열흘이 지났다.
며칠전부터 상하이 예보를 지켜봤었다. 꾸준히 '비'라는 표시가 있었다. 당일날 저녁 느즈막하게 비가 올 예정이라 우비를 챙겨가야 했다.
그러다 중국에 도착하고 예보를 보니, '맑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날 비가 왔다면 아마 여행이 상당히 고되지 않았을까 싶다.
아이의 겉옷을 짊어지고 다니다보니 체력이 바닥났다.
그나마 다행 이것은 아이들의 체력도 나와 다르지 않아다는 점이다.
다율이는 '회전목마'를 두 번이나 탔다. 회전목마고 하면 '제주'에 있는 신화월드에서도 많이 탔던 놀이기구다.
여기까지와서 회전목마만 타고 가기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이가 하자는데로 하기로 했다.
실제로 우리는 디즈니랜드에서 회전목마 두 번, 그리고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이름 모를 놀이기구를 한번 탔을 뿐이다.
어린시절을 떠올려보면 그렇다.
나또한 놀이공원을 가서 '회전목마'를 타고 싶었다. '회전목마'는 놀이공원의 상징 같은 거니까...
회전목마를 타면 빙글빙글 돌면서 부모님이랑 여유있게 웃으며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어쩌면 다율이의 머릿속에도 비슷한 생각이 들어 있지 않을까 싶다.
한국에 돌아온지 열흘, 아이들은 초등학교 2학년으로 복귀했다.
아이에게 꽤 미안한 것이 층간소음에 예민한 '이웃'이 있어, 이사한지 한달만에 다시 이사를 해야 했고, 같은 '이웃'과의 문제로 다시 '몇달' 뒤에 이사를 해야 했다.
처음에는 꽤 별일 아니었으나, 점차 문제는 커졌다.
이 일로 아이는 전학을 가야 했다.
층간 소음의 문제는 역시 예민한 문제다. 다만 아이가 없던 날 혹은 집에 아무도 없던 날마저 '소음' 문제로 방문하는 일은 꽤 힘들었다.
동네를 겪고 집을 구매하기로 했던 계획을 뒤로하고 다시 이사해야 했다.
아이는 지금도 아침에 눈을 뜨면 한자와 수학 문제집을 풀고 있다.
디즈니랜드를 떠났던 그날에도 문제를 풀었고, 도착한 날도 문제를 풀었다.
아무개는 '나'를 두고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럴수도 있다.
그런 융통성 없는 아빠 때문에 아이들이 고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건 나름의 원칙을 지켜가며 또 10일을 지냈다.
디즈니랜드에서 한참을 걸었다. 그곳의 벤치는 꽤 경쟁적인 사람들의 몫이다.
20대의 나 또한 '경쟁'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항상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내가 하면 다르다'하는 오만도 있었다.
실제로 당시에는 천운을 타고 '하는 일'마다 그렇게 잘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운' 피할 수 없는 힘을 만나고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겸손을 배웠다.
30대가 되서는 '내가 하는게 다 그렇지 뭐...'하는 비관주의에 빠질 정도였다.
모두가 다 자신만의 히스토리를 가지고 살아간다. 다만 정말 속터놓고 이야기 할 때,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 있는 '히스토리'를 품고 산다.
떠벌대기 좋아하던 내가 홀로 침묵을 지키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성숙했음을 말한다.
나의 '히스토리'는 어쩌면 죽을 때까지 누구에게 털어놓지 못할지도 모른다.
다시 디즈니랜드의 추억으로 돌아가서, 이날 벤치를 차지 못한 아이와 나는 길바닥에 철퍼덕하고 앉았다.
어린 시절에 어른들은 항상 나를 보고 말씀하셨다.
'남자 아이가 무슨 내숭이 다 있네' 하고 말이다.
실제로 그런게 있었는지 모른다.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었고 융통성이 없었던 탓에, 누군가 '해야 한다'고 하면 하늘이 무너져도 해야하는 걸로 알았다.
'어른들 말씀을 잘 들어라'라는 평범한 말도 반항하지 못할만큼 나는 꽤 복종적인 사람이었다.
바닥에 철퍼덕하고 앉아서 생각해보니, 괜히 그렇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배가 나온 아저씨가 되어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 사람이 됐지만, 20대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꽤 남의 눈치를 살피는 타입이었다.
아이에게 내가 늦게 배운 것을 알려주느라 자리에 앉도록 했다.
사람들이 지나가며 쳐다보지만 우리는 앉아서 그림자 놀이도 하고, 마시던 물도 뿌리며 휴식을 취했다.
스마트폰 배터리가 30도 남지 않았다. 일단 아이들에게 사진기를 넘겨 두었다. 잘 나온 사진보다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을 저장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이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사진을 찍으러 다닌다.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사주지 않았다.
앞으로도 사 줄 생각이 없다. 그래서 아이는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을 즐겁게 생각했다.
아빠의 허가 하에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아이에게 아빠를 찍어달라고 부탁했더니 '휙'하고 강물을 찍는다.
아마 못들었던 모양이다. 어쨌건 아이가 강물을 찍었고 이 여행에서 나의 단독 사진은 그렇게 한장도 없게 됐다.
디즈니랜드에서 한참을 놀다가 거의 저녁이 됐다.
나중에 할게 된 것은 우리가 입구에서 거의 6시간 이상을 보냈으며 뒷편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고 급하게 뒷편으로 넘어갔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주제로 한 미로공원을 비롯해 다양한 곳을 방문했다. 그곳을 들어서니, 사실 이 테마파크가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에이 됐다, 입구만 보고 나와도 즐거운게 최고다'
그렇게 우리는 더 돌아다니지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6학년 때인가..
우리집 양말은 항상 엄지 발가락에 구멍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신고 학교를 다녔다. '실내화'를 신고 학교를 다니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당시 '제주도'는 열린 교육이라며 실내화를 벗고 양말을 신고 교실을 다니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때 항상 '메롱'하고 양말 밖으로 튀어나오는 엄지발가락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양말을 앞으로 당겨서 발가락 사이에 접어두면 구멍난 줄 모르고 하루를 살 수 있다.
그러다 어떤지 마음을 바꿨다.
주변 친구들한테 엄지발가락이 튀어나온 양말을 가르치며 말했다.
'야, 봐바. 웃기지?'
그렇게 말하고, 아이들은 한번 낄낄 거리고 웃다 말았다.
'아, 이렇게 간단한 거였어?'
숨기고 다닐 때는 한없이 고통스러웠던 것이 사실 밖으로 꺼내고 보니 별것 아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마 규모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말하지 못하는 것.
그것도 구멍난 양말 수준의 유희면 휘발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 용기가 없다. 어쩌면 아직 준비가 덜 되서 그럴 수 있다.
사람은 견딜 수 있는 고통까지는 견뎌낸다. 뜨거운 냄비도 적당히 뜨거울 때는 쥐고 있을 수 있다. 도저히 말도 안되는 수준으로 뜨거우면, '쥔다'와 '놓는다'는 '선택'이 아니라 '반사적 행위'가 된다.
어쩌면 나의 고통은 감사하게도 견딜만한 수준의 것일 테다.
아이에게 버블건을 사주었다. 대략 6만원에 두 개 쯤 했다.
말도 안되게 비쌌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비싼 레스토랑이 아니라 '편의점 간식'을 선택한 아이들이다.
이날은 그냥 아이들이 하고 싶은데로 마음껏하게 했다.
최근 아이들이 부쩍 크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벌써 3월 14일이다. 아홉살 아이들은 주관이 확실하게 생겼다.
최근들어 아빠가 하는 말에 다 짜증이 나는 모양이다.
몇번을 참다가도 속이 뒤집어지면 나도 '아이 수준'으로 떨어져서 같이 싸우고 있다.
'그러지 말아야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항상 그렇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나는 모질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성인이 되고 시간이 지나고 어머니는 다른 말씀을 하셨다. 그러고보니 내가 예민해지고 신경질적이졌다는 체감이 스스로 든다.
비행기를 타면 '비상상황'에 대한 설명을 승무원들이 해준다.
비행기가 비상상황에 돌입하면 위에서 산소 마스크가 떨어진다.
우리의 상식으로 부모라면 그 산소 마스크를 '아이'에게 먼저 착용시킬 것 같지만 실제로 부모가 먼저 착용해야 한다.
부모가 먼저 산소마스크를 착용하고 아이의 산소마스크 착용을 도와주라고 알려준다.
실제로 그것이 아이와 부모의 생존력을 더 올린다고 한다.
아마 행복도 그런 것일까.
부모에게 산소마스크가 먼저 착용되지 않으면 오히려 아이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는 것.
일단 부모가 먼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해진다.
'상하이 여행'을 가기 전, 많은 블로그를 찾아봤다. 아마 필요한 내용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나는 사진만 훑고 넘어갔다.
혹은 개장 시간이라던지, 버스 시간 따위의 정보만 훑으며 찾고 넘어갔다.
누군가 긴글을 남기면 읽는 일은 적은 편이다.
이 글 아래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라는 상투적인 혹은 기계적인 댓글이 달리겠지만, 실제로 이 글을 정독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치는 않는다.
풍요속의 빈곤이라고 하던가. 때로는 대놓고 열어놓은 보물상자의 보물을 가져가지 않는다고 한다.
누군가에게도 말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블로그에 쏟아내는 것은 누군가가 봐주기를 바래서가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