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이 있을까봐, 문제를 올리진 못한다.
아이가 학교에서 수행평가를 봤다는데 100점을 받았다. 받아쓰기나 단원평가 같은 간단한 시험은 종종 치는 듯 하다. 초등학생들에게는 시험이 없다. 고로 우리 아이가 어느 정도 위치가 되는지 알 방법은 없다.
이런 깜깜이 기간을 6년을 해야 한다는 점이 답답하기만 하다. 요즘은 중학교 1학년도 자율학기라서 시험이 없다. 학생의 학업 성취율을 알 방법이 없던 학부모들은 난데없이 중학교 2학년 첫 중간고사에 아이의 위치를 파악하게 된다.
꽤 낭만적으로 그때부터 열심히해도 언제든 더 나아갈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중학교 2학년 중간고사를 치룬 상황이면 늦은 편이다.
루틴이 잡힌 아이와 그렇지 않은 학생은 스스로의 위치를 파악할 길 없이 6년을 더 생활한다. 스스로의 삶이 '기준'이 되면 '최선'이라는 기준점이 하향평준으로 내려온다.
다이어트를 통해서 마른 체형을 유지하는 사람은 많다. 다만 애초에 마른 체형인 사람을 이기기 쉽지 않다. 견뎌내는 것과 그저 그렇게 사는 것과의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아무개는 저녁식사로 '에이스 과자'에 커피 한잔을 했다. 그게 끼니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그것이 상식인 사람에게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목표를 갖고 매저녁에 그정도의 간단한 식사를 해야 한다면 나는 지속하지 못할 것 같다.
혹은 그렇게 지속하다가 그게 삶이 되지 않으면 말이다.
보통 그냥 그런 사람은 이길 재간이 없다.
어디를 가도 사람마다 보는 시선이 다르다. 카페를 가면, 어떤 사람은 그 카페의 분위기를 가장 먼저 살피고 어떤 사람은 '평수'와 '손님수', '테이블 회전률', '운영비' 등이 저절로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노력을 통해 얻어낼 수는 있지만 노력만으로는 안된다. 초기에는 노력을 하더라도 나중에는 노력이 '삶'이 되어야 한다.
양쪽을 신다가 오른쪽 양말을 안 신고 나갈 수는 없다. 그것은 굉장히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왼쪽 양말을 신고 오른쪽을 신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상한가.
그것을 우리는 '주관적 상식'이라고 한다. 당연히 이상하다. 과연 누가 양말을 한쪽만 신고 다니겠는가.
그런데 그정도의 당연함을 누군가는 '시간약속'에 둔다. 누군가는 '단어 암기'에 두고, 누군가는 '독서'에 둔다.
양말을 두쪽 다 챙기고 신는 것은 '노력'을 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참 신기하게도 모든 사람들은 단 한번도 그렇게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단연코 단 한번도 그렇다. 그 이유는 그것이 굉장히 '이상한 일'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떤 것을 상식으로 받아드리면 하지 않는 것이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진다.
시간강박을 갖고 있는 나에게 1분의 지각은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약속시간이 5분 지나서도 연락이 없다. 한참 늦은 뒤에야 전화를 하면 '아! 죄송합니다. 거의 다왔습니다!'라는 다급한 목소리만 전한다.
미안함이야 당연하게 갖고 있겠지만 1분이면 하늘이 무너지는 사람과 만남에서 그런 행동은 상대적 불신감을 키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사람은 실제로 재능이 없을 수도 있지만 대체로 '아무리 노력해도'라는 상대적 노력의 가치가 낮을 가능성이 크다.
뭐든 최선을 다하고 살 수는 없다. 다만 그럴 자신이 없다면 삶을 개량하는 편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