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무게, 의도의 한계에 대해서_선택의 역설

by 오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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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에는 일종의 '모순' 같은 것이 있는데, 그 선택의 의도가 '선' 했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북극곰을 살립시다'




점점 개체수가 줄어가는 북극곰을 살리자며 이야기 할 때, '그 북극곰을 살리면 매년 수천 마리의 물개가 죽습니다'라는 결과를 피할 수가 없다. 선택에는 필연적으로 다른 고통과 희생이 포함될 수 밖에 없는데 때로는 '선택'의 효과가 베이징 공원에서 시작한 나비의 날개짓이라 하더라도 지구 반대편에서 폭풍으로 일어나는 바와 같다.




그래서 '노자' 아저씨는 '무위자연'이라... 아무것도 관여하지 말라,고 했을까.




때로는 실제로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되돌아오는 부작용들을 감당할 에너지를 상실하여 무너질 때가 있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행위자'의 '의도'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우발적 범죄'도 엄밀히 말하면 '처벌'의 대상이고 '법'을 몰랐다는 이유로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법률불소급의 원칙'도 마찬가지다.




의도는 중요치 않다. 행위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다만 더 깊게 따지고 들어가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도 중요치 않다. 그래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가 더 중요한 문제일 뿐이다.




살다보면 이미 벌어진 일 때문에 가슴앓이 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곤 하는데, 그 시간마저 한참을 흘러보내고 나면 차라리 그때, 외국어나 공부해 두었으면 어땠을가 싶을 때도 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에 두부 한 모를 썰어내듯, 기억과 감정을 재단할 수는 없다. 다만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존재하기에 어떤 것에 고통 받고 있다면 아마 스스로 '그정도는 감당할 그릇'이 되기에 그렇다, 라고 여길 뿐이다.




짓누르는 무게로 한발 한발 나아갈 때,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건, 모순에 가깝다. 쌀 한 가마를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코끼리 한 마리를 짊어져야 한다면 애초에 어깨 위에 얹을 수 조차 없으니 말이다.




어쨌건 모든 일들은 자신이 감당할 만큼의 수준만 인식할 수 있다. 고로 살면서 '쌀 한 가마니', '두 가마니' 정도의 무게는 '체감'할 수 있으나, 코끼리의 무게, 고래 한마리의 무게는 애당초 '체감' 자체가 불가능하여, 스스로의 우주 속에 그러한 '무게'라는 것은 '무존재'나 다름없다.




고로 어떤 선택을 할 때, 어떤 이들은 선택이 가져오는 '나비효과'에 아주 극일부만 공감할 수 있고 어떤 이들은 그들보다 더많은 일부를 공감할 수 있겠으나, 선택이 만들어내는 모든 '역효과'를 모두 감내하며 살아가는 것은 역시나 불가능에 가깝다.




말인즉,




다시 최초의 이야기로 돌고돌아, 어떤 선택이건 의도가 중요하지 않고 결과가 중요하겠지만, 그 결과를 모두 인식할 수 없는 상태로 살아간다는 점에서, 애당초 '의도'가 가장 순수하고 중요한 점이지 않을까,




고로 그 의도는 과연 선택이 만들어낸 수많은 부작용을 인지한다고 하더라도, 될 수 있다면 '선'한 것이 좋고.




최소한으로 그것이 '선'하다는 것을 인식한 후에는 그 뒤에 다가 올 알 수 없는 부작용들을 인정하고 수용해아 하지 않나 싶다. 다시말해서 '의도'는 항상 '선'에 두고, 그 '의도'가 항상 '선'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며, 그 '의도'로 파생된 여타 다른 '악'에 대해서는 '겸허'하게 받아들이되, 그래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를 골똘히 고민하고 살아야지, 싶다.




'삶'.


아무리 그 의도 선하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사람과 환경에게 '패악'을 떨치고 살아가는가. 그 유감의 마음을 항상 가슴에 두고 '선'의 의도는 바꾸지 않되 최선의 대응을 할 수 있는 지혜를 기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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