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위정는 인생의 이정표를 제시했다.
15세는 지학으로 배움에 뜻을 두어야 하고
30세는 이립으로 스스로 설 수 있어야 한다.
40세는 불혹으로 미혹됨이 없어야 하고
50세는 지천명으로 하늘의 뜻을 알아야 한다.
60세는 이순으로 남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을 수 있어야 하고
70세에는 종심으로 마음가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지 않아야 한다.
이정표는 제시됐으나 이는 '이정표'일 뿐 때를 놓쳤다고 다음으로 넘어가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지 못했다면 40 혹은 50에 해도 괜찮고 남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을 수 있는 일은 15세에 해도 전혀 무방하다.
어쨌건 체계잡고 정리하기 좋아하는 '공자'로써 태어난 해를 몇바퀴 돌았는지 횟수에 따라 해야 할 것들을 정리해 두었는데 내가 태양을 중심으로 30번을 돌았으면 최소한 '스스로 일어 설 수는 있어야 한단다.'
본래 대부분의 동물은 어미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두발로 걷고 스스로 모유를 찾아 빤다. 다만 인간의 경우에는 굉장히 미숙한 상태로 태어나는데 소나 말과 다르게 자신의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여차하면 자기 목이 무거워 뼈가 뿌러져 죽는 경우도 많고 큰소리로 우는 탓에 맹수에게 쉽게 발각되기도 한다.
살갗은 어찌나 연약한지 얇은 가지에 긁혀도 영구적인 상처가 생겨 버리고 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이 까다롭기 그지없다. 우유를 먹고서 트림을 하지 않으면 먹은 것을 다 토해버리기도 한다.
커서는 먹고 싸는 일만 반복하는데 '부모'의 경제력에 기댄 채로 20년을 빈대붙는 굉장히 소비적인 생물이다. 현대 인간의 경우에는 난지 30년이 지났을 때까지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고로 인간의 사회성이란 단순히 '육아'를 목적으로 만들어졌음이 틀림없다.
연약한 아이는 독립적인 부부가 단독으로 길러낼 수 없다. 교육할 수 없으며 그것을 시도하려든다면 어두운 밤 맹수에게 잡혀 먹혔거나 굶어 죽었으리라.
결국 인간은 '타인'에게 기댄 인간만이 생존해 낼 수 있었으니 그것이 인간의 사회성의 기본이지 않을까 싶다. 공동으로 육아하고 교육하는 사회를 벗어나 드디어 '사회적 동물'로써 누군가를 '보살피는 역할'로 넘어가야 하는 시기는 분명히 있다.
누군가를 길러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일단 본인이 스스로 서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에게 의지가 될 수 있는 인간이 되는 바가 진정한 '사회적 인간'이라 할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혼자 우뚝하고 서 있어햐 한다.
'부처'가 태어나면서 '천상천하 유하독존'이라고 했던가.
일단 모든 것의 기초는 '홀로 서기'다. 홀로 서지 못하는 자는 결코 어떤 것도 하지 못한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간혹은 기댈 수 있지만 대부분은 스스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굳이 떠벌릴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 있는데..
첫째로 과거
둘째로 현재
셋째로 미래
과거로는 가정사, 유년시절 상처, 개인적 아픔, 이별의 슬픔, 실패의 기억, 과거의 치부, 이미 끝난 인간관계의 뒷얘기, 과거의 영광이나 자랑, 사소한 오해와 갈등
현재는 목표, 사생활, 경제력, 뒷담화, 현재의 고통, 건강문제나 병력, 가족 간의 불화나 갈등, 몸담고 있는 조직의 내부 사정이나 정보, 불필요한 질투심, 일상의 사소한 불만
미래로는 이루고 싶은 꿈, 불필요한 걱정, 자녀의 진로 계획, 죽음 이후의 분배나 상속 문제, '만약'을 시나리오로 하는 불필요한 가정.
그런 것들은 최대한 입 다물고 혼자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것들이 지켜지는 것이 진짜 '이립'이고 그것은 서른에만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학,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 그런 것들이 그때에만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닌 것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