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에 동굴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천 년 동안 어두웠던 동굴, 또하나는 백 년 동안 어두웠던 동굴입니다. 이 두 개의 동굴에 동시에 불을 밝히면 어느 동굴이 더 빨리 밝아지겠습니까'
깨달음을 얻는 일에 '이르고 늦고'는 없다. 천 년 간 어두웠던 동굴이나, 백 년간 어두웠던 동굴이나 불을 밝히면 밝아지기는 매한가지다. 얼마나 오랫동안 어두웠냐는 것은 중요치 않다.
책을 읽으면 '아...'하고 깨닫는 순간이 있다. 이는 '종교적 깨달음'이 아니다. 단순 '지식'으로의 깨달음도 포함되어 있다.
'아.. 이걸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아쉬움의 순간은 스스로를 자책하게 만든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모르고 살았던 시간보다 이제 알게 된 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불교'나 '성경', '사서삼경'에 대한 공부를 천천히 하고 있다. '명상 어플리케이션' '코끼리'에 꾸준하게 해당 주제를 연재 중이다. 불경, 성경, 논어 할 것 없이 세상에는 너무 좋은 가르침 투성이다.
어떤 글들은 익히 듣고 그 깊은 내막을 이해하지 못하고 살았다. 또한 어떤 글들은 난생 처음듣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마다, '아... 이걸 지금 알았네...'한다. 그러나 다시 '지금이라도 알게 됐다'로 넘어간다.
벌써 시간이 꽤 지난 일이다. 출구 없는 문제에 허우적 거리던 시기가 있었다. 실패를 나약한 이들의 결과물이라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다. '원'을 달성하지 못한 '패배감'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그러나 깨달았다.
한겨울, 신나게 장작을 떼다가도, 봄과 여름이 오면 장작 떼는 일을 멈춰야 한다는 것을...
'행동'이라는 것은 '시기'가 정해져 있다. 지금 옳은 것이 나중에도 옳은 것은 아니다. 시기에 따라 행동의 선악, 정반은 달라진다. 일관적인 열정을 다한다고 언제나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무 일 하지 않아도 '봄'이 온다. 그것은 얼마나 장작을 더 열심히 떼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이제 봄이 다가오고 있다' 하는 '앎'이 주는 여유가 있는지의 문제다. 봄이 있다는 사실, 그것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미친 척 장작을 준비하고 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되려 그런 일을 하다가 얼어죽는 일을 면할 수 있다.
당시 나의 상황도 그랬다. 순리의 방향 아닌 쪽으로 노를 저었던 기억이 있다.
'이겨내야 하느냐, 받아 들여야 하느냐'의 문제에 깊이 고민하곤 했다.
'받아들임'이 곧 '패배'라는 사실에 몹시 자존심이 상했었다. 그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모든 것을 소진하고 있었다.
당시 우연히 '유튜브'에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었다. 큰 이유는 없었다. '재미있어서..'라는 단순 이유로 들었다. 그렇게 꾸준하게 듣다보니 어느 순간, '툭'하고 나에게서 떨어져 나감을 느꼈다.
심적으로 굉장한 편함을 느꼈다.
그 인상이 꽤 깊었던 지라, '불자'도 아니면서 '불교철학'에 관해 관심을 가졌다. 이면에서 거부감을 주던 '신화적 서사'도 숨은 뜻을 생각해 보게 되고 그 관심은 '성경'과 '사서삼경'으로도 확장됐다.
지금도 나는 '불자'는 아니다. 그러나 '명상'을 좋아하고, '불교 철학'을 좋아한다. '법륜스님'의 책이라면 '구매'를 하고 본다. 동시에 '성경'이 주는 가르침을 좋아하고 '공자'의 말에서 해결책을 찾기도 한다.
아직도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들이 억수로 많다. 책에서, 영상에서, 삶에서 '아차차...'할 때가 많다. 그러나 백 년 간 어두웠던 동굴이나, 천 년 간 어두웠던 동굴이나 불을 밝히면 일순간 환해지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생각으로 꾸준히 배우려고 한다.
깜깜한 동굴을 걷는 듯, 허우적거리며 걷다가 좋은 문장을 만나면 동굴 어느 한편이 조금은 환해졌다는 안도감이 든다. 그리고 아직도 어둡게 그늘진 구석구석을 탐험해 보고 싶다는 탐구욕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