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 항상 가지고 다니던 수첩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가끔은 큰 실수를 눈감아 준다.
다니지 않던 길로 다녀본다.
자신을 위한 지출에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뭐 이런 류의 글이었는데 인터넷에서 본 글인지, 책에서 본 글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수첩 앞에는 항상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는 문구 몇 줄을 넣고 다녔다.
거의 다 잊어 버리긴 했는데 '가끔 큰 실수를 눈감아 주라는 말이 종종 떠오르곤 한다.
며칠 전 집에 돌아와 깨닫게 됐다.
아이에게 구몬을 하라고 사줬던 아이패드 미니가 다시는 켜지지 않는다. 내용인 즉 어떤 이유에서든 아이가 싱크대에 서서 아이패드를 뽀득뽀득하게 물로 닦았다. 아이의 다음 행동은 침수된 아이패드를 켜기 위해 몇번을 전원을 눌러 봤다는 것이고, 그래도 되지 않자 충전선을 연결하고 헤어드라이기로 말렸다.
아이가 했던 모든 행동은 '아이패드'가 물에 빠졌을 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의 전부였다.
실제로 아이패드는 완전히 고장이 났다. 수리를 하러 상담을 받았더니 차라리 새로 사는 게 나을 것 같단다.
그날 저녁은 짜증을 냈던 것 같다.
시간이 늦어 일단 아이를 재웠다. 아이가 잠들고 대략 1분간 곰곰히 생각해 봤다.
버린 패드, 새로 산 패드 해서 200만원에 가까운 지출이 생겼지만 이미 벌어진 일 아닌가.
'이렇게 됐다'는 상황은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지'를 고민해 보기로 했다.
짜증을 내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좋게 달라지는 점은 있는가.
아이가 더 조심하게 될까. 혹은 고장난 패드가 다시 살아날까.
아마도 아닌 것 같다.
나쁘게 달라지는 점은 있는가.
아이와 관계가 나빠지고, 아이가 의기소침해 질 수는 있다.
고로 좋은 것 없이 나쁜 것만 가지고 있는 반응이다.
빠르게 다음 스탠스를 잡았다.
그래, 그냥 넘어가자.
다음 날, 아이에게 대략적인 설명을 했다.
아이에게 이 실수에서 잃게 된 가치를 충분히 설명하고,
'실수는 했는데 아빠가 그냥 용서할꺼야. 실수는 할 수 있어'
하고 넘어갔다.
에잇. 모르겠다.
이미 벌어진 일 어쩌란 말인가.
이 용서로 인해 나는 굉장히 값비싼 것을 얻었다.
'큰 실수를 눈감아 줄 수 있다는 자존감(?)' 같은 것을 얻었다고 할까.
그건 200만원보다 더 비싼 것 같다.
요즘 각종 어플리케이션에서 '연말정산' 느낌으로 1년간 가장 많이 이용한 서비스를 정리해준다. '유튜브'라던지, '음악'도 그렇다.
최근 3~4년 간 내가 가장 즐겨 듣는 가수는 '성시경'이다. 거의 압도적이다. 애당초 다른 가수의 노래는 듣지 않고 한 가수만 거의 들으며 수년 가까이 시간을 보내는 듯 하다.
그가 한창 앨범 활동하던 2~30대에 나는 그의 목소리나 노래를 좋아하진 않았다. 그러다 점점 그의 노래를 듣게 됐는데 그게 참 묘한 매력이 있어, 그 사람 자체에 대한 매력이 느껴졌다.
무언가 항상 여유가 있는 모습이랄까.
그의 활동과 음악을 소비하고 있는 와중, 그에게 어떤 이슈가 있었다. 비슷한 이슈는 몇몇 있었겠지만 그 대처 방식과 그 마인드가 참 마음에 들었다.
돈은 많으나, 적으나 24시간 하루는 그저 지나간다. 8시간을 자고나면 16시간 밖에 안되는 시간에 밥먹고 씻는 시간, 운동하는 시간,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시간 등 쓸데 없는 시간, 일하는 시간을 모두 빼고 나면 실제로 일상을 흔들 만큼의 '댓가'는 크지 않다.
최근 '편안함의 습격'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현대인들은 스스로 '컴포트 존'을 줄이고 있단다. 발이 없는 사람에게는 발만 있어도 만족할 수 있고, 발만 있는 사람은 자전거만 있어도 만족 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본인'이 편안하다고 느끼는 '안전 지대'를 아주 좁게 설정하게 된다. 고로 돈이 많아서 이것 저것 많은 것에 편리를 느끼게 되면, 그만큼 스스로 작은 세계에 갇혀 지내게 된단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고.
뭐 그런 상태가 지속해야 아주 좋지 않겠나.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고자 '차'를 처분하고 1년 째 생활 중이다.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차차 적응하고 있다. 이제는 중고로 나온 싸구려 차만 타도 괜찮은 듯하다.
'나의 컴포트존'이 더 넓어졌다. 나는 작은 것에도 만족할 수 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나쁘지 않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잃어도 좋다'는 마음까지 생길 수 있다면 나의 컴포트존은 무한대가 되지 않을까.
아이가 선물해준 먹통 아이패드를 보면서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난 더 큰걸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