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것과 소설을 읽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나,
영어에는 '지각동사'와 '감각동사'가 있다. 둘 다 '깨닫다'라는 의미가 있어 비슷하다. 그런 탓에 '인터넷'에는 '지각동사'와 '감각동사'의 차이를 알려 달라는 학생들이 많다.
영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지각'과 '감각'의 차이다. 영화를 보거나 연극을 보는 것은 '지각'에 해당한다. 지각은 반드시 '목적'이 필요하다. 주체는 '목적'이 주는 정보를 받아드릴 뿐이다. 수동적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남자를 보거나 남자가 하는 말을 듣는 등이 이 행위다. 우리는 그 남자의 '표면적 행동'을 보게 된다. 남자가 '느끼는 바람', '향기', '기분'은 알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나 연극에는 '독백'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각하여 알 수 없는 감각을 담기 위해서다. 제3자는 말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는 정보가 있다. 이들은 구태여 이런 정보를 '말'로 표현한다.
'이거 꽤 힘들겠군...', '이런 행복한 기분은 처음이야'처럼 그렇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는 독백이 많다. 문학에서는 '감각'을 담을 수 있으나 '극'에서는 담을 수 없다. 고로 희곡에서는 현실에서는 잘 하지 않는 독백과 혼잣말이 엄청나게 많아지게 된다.
다시 영어로 돌아와서 감각동사에는 '목적'이 없다. 1인칭이 감정을 갖게 됐는지를 서술할 수 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다'라던지, '코끝이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시리다',처럼 말이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것이 있다. 우리는 평생 살면서 '본인의 자아'를 제외하고 단 한번도 '일인칭'이 되어보지 못한다. 감각은 주체가 직접 그 감정을 경험하는 일이다.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 또다른 자아를 갖지 않는 이상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일인칭으로 보고 생각한다.
그 밖에 대부분의 정보는 '지각'이다. '지각'은 방관자의 역할 밖에 되지 않는다. 단순히 목적이 보여주는 표면만 보게 된다.
현대인들은 유일하게 '자아'와 '문학'을 통해서만 '감각'을 경험할 수 있다. 문학에서는 '자아'가 바뀌는 것이 핵심이다. 자아가 자아가 바뀌는 것은 다중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거나 기억을 상실한 알츠하이머 환자처럼 의식의 일부가 변화하는 일이다.
'론다 번'의 '위대한 시크릿'에 따르면 '자아'는 '관찰자'다.
쉽게 설명해서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은 '나'가 아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고 질문하면 대부분 '이름'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름'은 '나'를 부르는 호칭일 뿐이다.
'남자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남자'는 '나'가 가진 성별이지, '나'가 아니다.
'나'라는 것은 감정을 관찰하는 존재이며 '존재'한다고 자각하는 존재이며, 화를 내거나 슬프거나 행복한 감정이 일어나고 있다고 '자각'하는 존재다,
불교에서는 고로 '자아'와 '아바타'를 구분한다. 아바타는 껍데기다. '자아'는 '성별, 이름, 나이, 키, 과거' 등을 가지고 있는 아바타를 바라보며 그것을 깨닫는 존재다.
우리는 이름을 바꾸어도, 성전환 수술을 하더라도, 직장을 옮기고 사는 곳을 옮기고 언어를 바꾸더라도 여전히 존재한다. 이 자아는 다시 말해서 '감각'을 느끼는 존재다.
즉 문학은 현실 '아바타'에만 갇혀 있는 '자아'가 다른 '자아'가 될 수 있는 방법이며, 영화에서 다른 아바타를 조종하는 것처럼 언제든 '문학'이 주는 간접 체험을 경험하게 한다.
언제나 '자아'는 간접 체험만 한다. 고로 우리는 '직접체험'과 '간접체험'을 구분하지 못한다. 둘다 스스로의 체험이며 많은 체험을 한 자아는 언제나 더 풍부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