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보고 있다고 믿는가_악의 평범성

by 오인환

대개 이렇게 생각한다. 보고 있으면 알고 있다고.

눈앞에 존재하고 형태도 분명하면 우리는 그것을 보기 있다고 생각한다. 그 존재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다. 다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명료하고 분명하게 보고 있지 않다.

사람은 같은 말을 듣고도 누군가는 상처를 받고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넘긴다. 이런 차이가 사람 사이에 갈등을 만들어낸다.

같은 노래를 들어도 누군가는 좋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시끄럽다,고말한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누군가는 덥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춥다,고 말한다.

이러한 것은 '대상'과 '환경'이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인식'의 차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다보면 꽤 무례한 사람을 만난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무례한 사람'은 자신이 '무례하다'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들의 생각할 때, 그 행동으로 불쾌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같은 음식을 먹고도 느끼는 바가 다르고, 같은 공간에 있어도 추위와 더위를 느끼는 지점이 다른 차이를 만들어낸다.

과거 프로이센 왕국 출신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런 질문을 했다.

'우리는 정말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가'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보고 있다고 믿는 세계는 대상 그 자체가 아니다. 인간의 감각과 경험, 그리고 사고의 틀을 통과한 결과물에 가깝다.

우리는 세계를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다. 즉 우리는 '감각'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서 절대적인 존재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인 즉, 우리가 대상의 본질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그것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렌즈'가 깨끗한 상태여야 가능하다. 그 '렌즈'인 '이성'에 대한 비판을 함으로써 우리가 올바른 세상을 보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것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다.

인간의 감각과 경험, 사고의 틀은 고로 세계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한다. 같은 세계이지만 다른 세계를 보고 살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같은 글을 읽고도 감동하고 누군가는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하는 이유다. 문제는 대상이 아니라 인식하는 방식이다.

예술의 세계에서 사진기가 등정하기 전까지 회화의 중요한 가치는 얼마나 보이는 것을 정확하게 그려내는가 였다. 다만 사진기가 인간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현실을 복제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고민에 빠졌다.

정말 '저 기계'는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다고 할 수 잇는가.

그런 질문에서 표면은 대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느낌과 시간, 맥락, 시선을 다루는 방식으로 회화가 발전하면서 추상미술과 입체미술이 탄생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자각.

불교에서는 이를 '무명'이라고 불렀다.

무명이란 알아차림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알아차림이 개입되어 있지 않기에 '밝음이 없는 상태'가 무명이다.

대상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가 흐려져 있기 때문에 그 어둠은 대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의미다.

좋다와 싫다, 이득과 손해, 남의편과 내편을 나누며 다양한 판단이 개입되면 대상은 언제든 왜곡된다.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수많은 선택을 한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다' 혹은 '악의는 없었다'라고 말한다.

다만 문제는 '악의의 유무'가 아니라 '행동 자체'에 있다.

20세기 정치 철학자 한나는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고 불렀다.

거대한 학은 사악한 인물의 목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치시대 근면한 공무원이 수백만의 사람들을 수용소로 끌려가도록 했다는 점은 사실상 악이라는 것은 '의도'와 상관없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이 없는 상태'에서 벌어진다.

문제는 악의와 잔혹함이 아니라 사유의 중단에 있다. 즉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악해지지 말자는 다짐보다는 스스로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악은 '의도'가 아니라 '자각하지 못함'에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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