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 로빈스'의 '렛뎀이론'은 간단하다.
'그냥 두는 것'
말그대로 '(LET THEM)'하라는 것이다. '이론'이라는 이름을 붙여 어딘가 특별해 보이지만 그닥 특별한 이론은 아니다.
만약 내가 잘해줬는데 상대가 고마워하지 않는다고 해보자, 이때 감사의 표현을 강요하거나 기대하지말고 그 자체 두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보자, 이때 상대의 반응에 대해 지나치게 변화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두는 것이다.
이 개념은 '아들러'의 '과제분리' 이론과 닮았다.
'알프레드 아들러'는 '개인심리학'에서 '과제분리 이론'을 말했다.
어떤 문제나 감정, 결과가 누구의 선택과 책임에 달려 있는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가령 내가 잘해줬는데 상대가 고마워하지 않는 경우, 감사표현 여부는 '상대의 과제'다.
내가 계속 잘해줄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나의 과제'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싫어한다는 알았다고 했을 때, 그가 나를 좋아할지 말지는 '상대방의 과제'다. 그 사실을 알고 난 후에 관계를 조정할 것인가, 더 잘보이려고 애쓸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나의 과제'다.
예전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강의에 비슷한 질문이 있었던 적이 있다.
정확한 질문과 대답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비슷하게 이야기를 엮어보자면 이렇다. 질문자의 동생이 '경제관념'이 너무 없어서 '신용불량'이 될 위기에 처해져 있다. 동생은 심지어 부모님께 돈을 빌리기도 하고 취업은 하지 않고 집에서 게임만 한다.
이 경우에 어떻게 하면 '동생이 정신을 차릴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다.
스님은 참 별것 아닌 것에 다 신경을 쓰고 있다고 했다.
메뚜기 교미하는 것도 간섭하고, 다람지 도토리 줍는 것도 간섭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질문자에게 이는 '남'이 아닌 '동생'의 문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는 '동생 과제'일 뿐이다. 동생이 돈이 없어서 빌려 달라고 요청하면 '싫다'고 하면 그만이고, 마음이 불편하면 '빌려주면 그만'이다. 그것은 '동생의 과제'가 아니라 '질문자의 과제'로 넘어간 셈이다.
즉 상대의 과제와 자신의 과제를 분명하게 분리하는 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책임'의 경계를 분명하게 하는 일이다.
'렛뎀(LET THEM)'이 말하는 '그냥 두라'는 말도 체념이 아니라, 통제 욕구를 내려 놓으라는 말과 가깝다.
누군가가 나를 싫어한다면 그 감정은 그의 것이다. 누군가가 감사하지 않는다면 그 태도 역시 그의 것이다. 누군가가 인생을 망치고 있다면 그 선택은 그의 것이다.
문제는 늘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는 타인의 선택을 자신의 문제로 끌어온다.
"왜 나를 싫어하지?"
"왜 고마워하지 않지?"
"왜 정신을 못차리지?"
이 질문은 대부분 통제 욕구에서 출발한다.
타인과 자신의 책임에 대한 경계가 무너지면 '상대에 대한 통제욕구'가 발생한다. 타인의 감정까지 책임지려고 한다거나, 타인의 인생을 대신 설계하려고 하기도 한다. 그러다 결국은 분노하나 지친다.
부모자식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아들러 식으로 말하면 타인의 과제를 떠안는 순간 삶은 무거워지게 된다.
이런 관계에서 과제분리가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얻기 때문이다. 부모는 '내가 질 키웠다'는 증거를 얻길 원하고, 교사는 '내가 잘 가르쳤다'는 증거를 얻길 원한다. 연인들은 '나는 사랑받는 사람이다'라는 증거를 원한다.
그 증거를 '타인의 반응에서 얻으려고 하는 순간' 경계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고로 결론은 단순하다.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상대방'의 몫으로 두고,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만 '나의 몫'으로 두는 것이다.
가수 '양희은' 님이 하는 '그러라 그래'가 떠오른다.
'멜 로빈스'의 책은 아주 오래 전에 '5초의 법칙'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무언가 대단한 과학적 혹은 인문학적 통찰을 담아내는 책이라기보다 '개인'과 '주변'의 사례를 모아 놓은 책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