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에는 '명시적 앎'과 '암묵적 앎'이 존재하다. 단순히 웹사이트의 비밀번호나 아이디를 외우는 것은 '명시적 앎'에 속하고 외국어로 소통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탈줄 아는 일은 '암묵적 앎'에 속한다.
인간의 '앎'에는 이렇게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명시적 앎은 언어화 할 수 있는 '앎'이고 암묵적 앎은 언어화 할 수 없다.
밤을 새워 침을 튀기며 떠들어도 자전거 탈 줄 모르는 사람을 탈 수 있는 방법으로 바꿀 수 없고, 아무리 책을 읽고 학습을 해도 어떤 경험은 결코 훔칠 수 없다.
고로 '정보를 전달하는 책'이라는 것이 '앎'을 위한 '완전한 도구'가 될 수는 없다.
단순히 해외로 가는 비행기표를 예약하는 방법이나 고장난 전자제품을 수리하는 일에는 충분히 문자나 언어가 도움이 된다.
그러나 부자가 된다거나 부지런해진다거나 운동을 하는 일 따위에서 정보는 하등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암묵적 앎'이다. 이것은 내재화 되어 있는 앎이다. 내재화 되어 있는 앎은 누구에게 전달하지도 못하고 누구의 것을 훔치지도 못하며 빼앗기지도 않는다.
아무리 자전거를 오랫동안 타지 않아도 그것을 잊어버리는 일은 없다. 그러나 어떤 웹페이지의 비밀번호는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앎이라는 것은 '암묵적 앎'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화 된 지식은 누구라도 복제할 수 있다. 빼앗길 수 있고 훔치거나 훔쳐 질 수 있다. 인공지능이 발달하면서 그런 정보는 더 얻기 쉬워지고 그런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경쟁자'가 무한대로 넓어지면서 '정보'의 가치는 바닥으로 하락하고 만다.
고로 내가 얻어야 하는 지식이란 암묵적 앎에 속한다.
언어를 익히고, 문화를 익히고, 사람을 익히는 일.
습관을 고치고 체험을 하고, 실패하고 느끼는 일.
계발서가 아니라 '문학'을 읽고 'GPT'가 뱉어 낼 수 있는 정보가 아니라 '내재화 된 생각'을 글로 쓰며 그런 암묵적 앎을 얻고자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