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스치고 지나가는 삶 중 좋은 것 골라내기_아무

by 오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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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자기고백적이며 유쾌한 도입이 있을까,

정혜윤 작가의 '아무튼, 메모'의 도입을 읽으며 잠시 웃음이 나면서도 이렇게 '모순된 도입을 시작할 수 있는 당돌한 자신감'에 감탄하기도 했다.

주변에서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메모광'이 메모에 관한 글을 쓴다고 할 때의 반응을 이야기 하면서, 이 글의 '신빙성'을 극한으로 끌어 올리더니, 결국은 '자신감'있을 법했다는 인정으로 마무리를 짓게 하는 글이었다.

책은 매우 짧다. 아이패드 미니 사이즈의 전자책으로 읽으니 120쪽 남짓인 걸 보니, 실제 원고도 그리 많은 분량은 아니었을 것이다.

'메모'에 관해서는 나도 한 때, 광적인 집착이 있었다. 지금은 그정도의 집착은 아니었으나 내가 한창 집착에 가까운 수준으로 메모에 몰입하던 시절은 '고3시절, 군대시절, 유학시절'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고 재미있던 시절에 매일 같이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은 내 삶 전체로 봤을 때 '축복'과 같은 일이다.

'정혜윤 작가'의 글에 메모를 하지 않은 하루에 대해 '오늘 하루가 날아간 것 같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딱 당시 나의 심경을 대변하는 말이다.

당시에는 얼마나 집착의 수준이 강했는지, 매일 날씨를 기록했다. 그러다가 '마음의 날씨'도 기록했다. 마음의 날씨 옆에는 한자로 '상', '중', '하'를 표시했는데 기 표시의 기준은 하루를 마무리 하면서 영화 평론 하듯, 나의 하루에 평점을 매기는 방식이었다.

마음의 날씨는 보통 ^v^, ^-^, ㅡㅡ,ㅜㅜ 처럼 간단한 표정 이모티콘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그 뒤에 '상'이라고 적어 두었다. 그러고보니 일상이 '상, 중, 하'로만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상상', '상중', 상하', '중상, 중중, 중하', '하상, 하중, 하하'와 같이 분류했는데 이 분류법은 시간이 가면서 '상상상, 상상중, 상상하' 처럼 3단계로 분류했다.

이 기록은 못해도 3년 이상은 기록했으니 몇년 몇월 며칠의 나의 기분이 어땠는지 알 수 있게 됐다.

당시에는 글 쓰는 일에 부담을 갖지 않았다. 누군가가 볼 일도 없었고, 그저 스스로의 생각일 뿐이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글은 10년 뒤, 나에게 편지이기도 했고, 보내지 못한 누군가에 대한 편지이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는 '시', 어떤 경우에는 영화평론, 어떤경우에는 독후감이기도 한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 여기에 올라가는 글보다 더 솔직한 나의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내일 학교갈 준비는 다 했냐는 물음에 딸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

"아빠, 3학년은 너무 힘든 것 같아."

배울 것도 많아지고, 영어도 배워야 한단다. 그말을 듣고 한참을 빵하고 터져서 자지러지게 웃었다. 이 귀여움은 아마 열흘 뒤면, 다음달이면, 내년 이맘때쯤이면 완전히 잊혀지겠지...

그러나 이 대화를 여기에 기록하면서 나는 아이와의 추억을 박제 할 수 있게 됐다.

정혜윤 작가의 글에 이런 표현이 있다.

"메모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자신에게 선물하는 셈이고 결과적으로 메모는 자신감 혹은 자기 존중과도 관련이 있다'라고 말이다.

내가 수년간 썼던 종이 메모들은 지금 본집에서 보관중이다. 수천권의 책이 꽂혀있는 책장중 일부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모든 책들보다 독보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앞서 말한 정혜윤 작가의 표현처럼 메모는 나에게 하는 '선물' 같은 것이다.

어쩌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꽤 비싼 어떤 것과 바꾸겠냐고 물어도 바꾸지 않을 것 같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메모를 한다는 것은 무언가 중요하게 여기고 싶어한다는 뜻'이란다. 20대와 30대, 젊은 나는 그의 삶에서 무엇을 가치있게 여겼고 무엇을 남기고 싶었을까, 그 기록은 어떤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한다.

'생각'을 종이에 남겨두고, 이렇게 30대, 40대하며 나이를 먹어간다. 생각은 깡깡얼은 채로 종이 위에 남겨져 있지만 물렁물렁한 이 육체가 노화되는 걸 보면 메모는 '영원히 늙지 않는 기술'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나의 글은 내가 한살과 한살을 더 들어갈 수록 더 가치 있어질 것 같다.

누군가의 글을 읽는 것은 다른 누군가를 닮으려고 노력하는 행위와 같다. 그녀의 글에 비슷한 구절이 있었는데, 사실 매일과 같이 누군가를 담고 싶어하고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타인의 그림자가 되는 삶에서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글'을 누군가는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삶'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작가는 어쩌면 '스스로'일 뿐이다. 지난 10년 간, 잊고 있던 '하루에 대한 평론'을 다시 해보면 어떨가... 하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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