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앞뜰'에 나란히 있는 두 개의 창, A와 B가 있다. 목격자가 없는 상황에서 한 '범인'이 건물 안으로 침입했다. 범인은 창 A와 B 중 어느쪽으로 침입했을까.
논리적으로 A와 B 둘 중 어느곳으로 침입해야 하지만 '전자'라는 범인은 '두 창'을 동시에 통과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범인인 전자'가 A 창에 있었다면 B 창에는 없어야 하고, B 창에 있었다면 A 창에는 없어야 한다. 그러나 사건 당시 목격자는 아무도 없었고 목격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두 창을 동시에 지나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그런 일을 본 적 없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과 '그런 것을 본 적 없다'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어떻게 입자가 동시에 두 군데 있을 수 있죠?"
"왜 관측하면 결과가 바뀌는거죠?"
이 질문에 한 과학자가 답했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시오. 그냥 그렇게 작동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재차 이해를 시켜 달라는 말에 덧붙였다.
"우주는 당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오."
양자가 가지고 있는 역설에 대한 이야기다.
전자는 A도 아니고 B도 아닌 것이 아니다. A이면서 동시에 B인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후다. 우리가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다른 가능성은 무너지고 하나의 결과값만 남는다. 관측이 결과를 바꾼다는 의미다.
이는 역시나 비상식적으로 작동하는데, 인간은 여기서 '비상식적'이다,라는 말은 '자연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 된다. 인간의 '인지력'을 절대값에 둔 커다란 오류다. 이 얼마나 대단한 오만인가, 인간의 '인지력'과 '우주의 이치' 중 '우주의 이치'가 비논리적이고 비상식적이라고 믿는 판단 말이다.
다행히 과학자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태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했다. 양자역학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기술과 예측의 대상'으로 둔 것이다. 그것이 '왜' 그렇게 되는가,를 생각하는 대신, 수학적으로 증명하고 결과가 맞는지 확인할 뿐이다.
하나의 전자가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관측이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것, 확률이 실재를 대신한다는 것.
양자역학은 '수천년 넘은 동양철학' 같은 모호함과 궤를 같이한다. 이 아이러니함은 21세기에 가장 정밀한 과학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고전물리학을 보면 직관적으로 '그럴 수 있겠다'하는 이해의 범주 내에서 발전해 왔다. 이는 아무리 천재 과학자들의 발견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마주하는 가시세계에 관한 이야기라서 그렇다.
그러다 20세기에 이르면서 '양자역학'부터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X축도 Y축에도 속하지 않은 그 모호한 어딘가에 존재하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
그러나 좌표평면상 'X축'과 'Y축'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경계 어디선가에도 분명 존재할 수 있다.
이처럼 수학이라고 하는 언어로 밖에는 관측할 수 없는 '미세한 세계'가 언제나 신비스럽다.
'김상협 작가'의 과학을 연결하는 최소한의 양자역학에서는 아주 쉽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양자역학'의 개념과 역사를 설명한다.
여기에서 들고 있는 많은 예시들은 물론 작가의 말에 따르면 완전히 상황에 부합하지 않지만 충분히 흥미를 줄 수 있고 이해할 수도 있다.
책은 '무시무시한 양자역학'을 다뤘다는 주제와 다르게 굉장히 쉽고 가볍다. 완독하는데 시간도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 다만 주제 하나하나마다 덮어놓고 생각할 거리가 많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