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발] 숫자가 주는 고정관념
성장하는 오십은 늙지 않는다 독후감
나는 50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었다. 50이 아닌데 왜 50세에 관한 책을 읽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의사가 아님에도 골든아워를 읽었고 미국 대통령이 아님에도 'A promoise land'를 읽고 있다. 같은 이유다. 독서의 기본은 호기심이고 이를통해 타인의 삶과 생각을 일부 들여다보는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나이를 먼저 겪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은 어떨까. 최근 '꼰대'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나이 많고 고리타분한 성격의 사람을 '꼰대'라고 부른다. 젊은 층에서 부르는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일정 연령층 이상에서는 과한 에너지를 사용한다. '이렇게 말하면 꼰대 처럼 보일까' 혹은 '이렇게 행동하면 꼰대스러울까' 어른의 조언이 더이상 아랫세대에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시대가 오면서 '386세대'라는 50대 층은 위에서와 아래서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샌드위치처럼 낀 세대가 되어 버렸다. 지금의 젊은 세대의 삶은 바로 윗세대의 삶과 크게 다르다. 비록 동년배의 유럽, 미국 친구들과 비슷한 문화를 공유할 지언정 윗세대와 세대단절이 생겨 버렸다. 스마트폰 하나만으로 '은행업무'나 '쇼핑', '사교' 등 거의 모든 활동을 하고 있는 세대에게 윗세대는 더이상 가르쳐줄 것 보다 배울 것이 많아지게 됐다.
시대가 어떤 이데올로기의 전환을 맞이 할 때, 일종의 성장통은 당연하다. 011, 017, 019 등의 2G 번호는 이번 6월 말까지만 이용가능하고 서비스가 종료된다. 이 번호를 사용하던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사용하던 방식을 오랫동안 유지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소수가 되어 사회의 부담이 된다는 명분으로 서비스 강제종료를 당한다. 단순히 한 한호를 36년 동안 사용했다는 것은 큰 잘못이 아님에도 해당 기사에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사회적 비용만 갉아먹는다는 이유로 번호 사용자를 매도했다. 단순히 오래됐다는 것은 혹은 시대의 흐름에 조금 늦었다는 것은 예전과 같이 존경받고 위엄있는 일이 아니라 고리타분하고 아둔한 것이 되어 버렸다. 민주화의 큰 변화 속에서 윗 세대에 크게 저항했던 '386세대'는 그 윗 세대의 불합리성을 절반정도 맛보고 투쟁을 통해 다음 세대로의 전환을 만들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를 이끌던 이들의 자부심은 무한경쟁 속에서 사회보다 자신의 앞가람이 먼저인 다음 세대(88만원 세대)에게 공감하기 어려운 이슈였다. 결국 '386세대'는 위와 아래른 나누는 전환기의 세대로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미움받고 공감받지 못하는 세대가 된 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어느 세대나 해당 세대 만의 어려움이 반드시 있다. 어쨌건 이 책은 대한민국에서 50을 맞이 한 여성의 글이다.
에너지를 사용할 때, 우리 뇌에서는 POMC라는 단백질 분해 현상이 일어난다. 이 단백질 분해 방법은 '좋다'라고 생각할 때와 '싫다'라고 생각할 때 다르다. 즉, 단순히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생각일 뿐만 아니라 우리 신체반응으로 이어져 독성이 강한 활성산소를 만들어 내느냐 아니냐로 이어진다. 즉, 우리를 노화시키고 병들게 하는 것은 '나이'가 아니라 '스스로의 생각'인 샘이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던 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지나, 장년과 중년으로 넘어감에 따라 나이에 대한 관점이 성장에서 노화로 바뀌어간다. 이렇게 노화로 바뀌는 이유는 자신의 가치가 점점 낡아간다는 것을 인지하기 때문이다. 꾸준하게 성장하는 사람에게는 노화가 진행하지 않는다. 70년을 사는 솔개는 그 수명의 절반을 넘기고나서 자신의 깃털을 스스로 뽑아 버리고 자신의 부리를 바위에 부딪혀 깨어 버린다. 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결심할 시기는 그들의 삶의 중반부다. 그 고통의 순간을 이겨내면 그는 새로운 모습으로 '환골탈태'하여 나머지 수명을 이어 살아간다. 자신을 지금껏 지탱해 주었던 것들에 감사함을 느끼지만 반드시 그것을 스스로 깨어내어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겪는 것은 중요하다. 모든 변화는 고통이 따른다. 다만 그 고통 뒤에는 새로운 삶이 존재한다.
아무리 잘나가는 운동 선수라고 하더라도 선수생활은 40대를 넘지 못한다. 즉,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는 명망을 쌓더라도 40 이전과 이후의 삶은 완전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삶이란 분명한 순간에 피할 수 없는 변곡점을 맞이한다. 자신이 유일하다고 생각했던 세상의 결별하고 다시 유아기처럼 새롭게 시작해야하는 나이가 와야하는 것이다. 한때 유럽의 분데스리가에서 '차붐'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엄청난 선수활동을 하던 차범근 또한 어느 순간부터는 '해설자'로 혹은 '리더'로 새로운 평가를 받아야 했다. 그가 선수로 좋은 활약을 했다는 것은 처음에는 이목을 집중시키지만 어느 순간 부터 사회는 그를 '리더'의 역할과 '해설'의 능력을 가지고만 평가한다. 인생의 절반에 갖게 될 변곡점은 미쳐 놓쳐버린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고 새롭게 시작할 기회가 되는지도 모른다. 절반담긴 물컵을 바라보며 '반만 있네'와 '반이나 있네'의 차이처럼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절대적인 물의 양보다 중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 책임져야하는 자아의 수는 늘어나기만 한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저 '아들'과 '딸'의 역할만 주어졌던 반면 시간이 들면 '형'이나 '언니'가 되고 '선배'가 되고 '아빠'나 '엄마'가 된다. 계속 나이가 들면서 '며느리', '아내', '엄마' 등 상충되는 여러 자아가 꾸준하게 생겨난다. 이런 것들은 점점 부담으로 다가오고 각 자아의 정형화된 모습으로 바뀐다. 우리의 뇌가 동시 다발적으로 작동하기 어렵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자동화'되어지는 것처럼 나이를 먹을 수록 '보수적'이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처럼 외부적인 '자아'가 많아질 수록 본래 '자기자신'의 설 공간은 줄어든다. 꾸준히 사회적 자아만 키우다 보면 스스로를 잃어버릴 시기가 오고 그것은 앞서말한 50의 변곡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예상해본다는 것은 이처럼 책이 아니고서는 쉽지 않다. 책은 분명 작가와 비슷한 동년배의 누군가를 위로 할 것이다. 혹은 그 나이가 오지 않은 누군가에게는 나와 같이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 줄 것이다. 먼저 도달한 이들의 삶을 미리 엿보는 것은 인생이라는 시험에서 선배의 답안지를 들여다보는 것과도 같다. 비록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참고는 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엿보고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