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숲 어린이집 독후감
독특한 구성의 소설이다. 얼핏 소설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않고 책의 첫 장을 넘긴다면 이 책이 소설이라는 것을 모르고 읽게 될 것이다. 소설의 제목인 '자작나무 숲 어린이집'은 작가가 만들어낸 상상 속의 장소다. 이 소설은 꽤 구체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다. 경기도 시흥의 어느 곳에 위치한 이 어린이 집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여러 사람의 눈으로 살펴본다. '송휘령 작가' 님은 실제로 15년이 넘게 보육현장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특정한 어떤 사건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기 보다 십 수 년 겪었던 여러 이야기와 사건을 복합적으로 풀었을 것이다. 대략 스무명 가까운 인물들이 각자의 시각에 따라 '에세이'를 작성한다. 나이와 직급, 상황이 모두 다른 여러 인물들의 에세이가 가상으로 얽히며 어린이집이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60세의 고은희 원장 선생님 부터, 30대의 곽세영 주임선생님, 20대 조리 선생님과 60대 시간연장 선생님, 그리고 사회초년생인 선생님들까지 여러 시각이 모두 담겨져 있다. 또한 등장인물에 소개되지 않은 학부모와 아이들의 캐릭터까지 모두 합치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아주 많다. 이 모두가 각자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소설은 읽다보면 가끔씩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를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 소설에 '송휘령 작가' 님의 20대 부터 50대까지의 모든 경험과 생각이 각자 캐릭터 속에 녹아져 있을 것이다. 아무리 소설이지만 작가의 경험과 성격을 배제하고 완전한 허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쓰는 이의 가치관과 경험은 소설의 배경 속에 자연스럽게 묻어진다. 이 소설은 작가의 말처럼 70%의 진실과 30%의 허구로 이뤄져 있다.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다보면 비슷한 사건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 이런 그런 사건을 한 소설의 이야기로 묶는 것은 십 수 년 간, 작가가 해왔던 생각과 경험을 함축적으로 엿보는 기회가 된다.
나의 아이들은 5살이다. 어린이집 반의 이름은 '초롱반', '예쁜반' 등 귀여운 이름으로 나눠져 있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게 구분된 부서에는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감정노동자들이 근무하고 있다. 쌍둥이 아이를 키우다보면 큰소리를 치지 않고서 키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보통의 부모는 학교나 유치원, 학원, 어린이집의 선생님에게 자신도 불가능한 능력을 기대한다. 어느날 다율이의 볼에 깊은 손톱자국이 생겼던 적이 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함께 다니는 남자 아이가 꼬집었단다. 여자 아이의 얼굴에 흉 질 뻔 했다는 사실에 조금 신경이 쓰였다. 항상 선생님이 보내주시는 교육활동 문자에 스치듯 관련 내용을 보냈던 적이 있다. '아이가 싸우더라도 상쳐간 아지 않도록 조금만 살펴주세요.'라는 정중한 메시지였다. 문자 전송 뒤에 선생님은 바로 전화를 주셨다. 마치 죄인이라도 된 것 처럼 상황설명을 하시며 죄송하다고 말씀해주셨다. 유난스러운 부모가 된 듯 죄송스러웠다.
어린이집 교사는 실제로 굉장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뉴스를 보면 가끔 나오는 '질 좋지 않은 보육교사'의 이슈를 마주하곤 한다. 따지고보자면, 몇몇의 사회적 이슈로 그들의 노고를 폄하하기엔 보육이라고 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보통 '부모가 아이를 키운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더 많은 경험을 한다. 보육과 교육이란 사람을 보호하고 완성된 인간으로 만들어 내는 숭고한 일이다. 그 일을 대신 해주는 이들에 대한 감사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마치 자신이 완전하게 아이를 키워낸다면 아무런 결점 없는 완전한 인간으로 키워 낼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 일부 부모는 '우리 아이'를 보호하지 못하는 '교사'를 나무라곤 한다. 소설에서도 부모가 교사를 몰아부치는 장면이 나온다. 교사가 연신 '죄송하다'라고 머리를 조아린다. 원장은 무릎을 꿇는다. 과연 우리 아이를 보호하고 완전한 인격체로 만들어주는 교사에게 그토록 함부로 할 수 있을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예로부터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고 살았으므로 '보육'에는 공동의 수고가 필수였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다. 다만 누군가의 수고와 고마움에 그에 합당한 '댓가'를 지불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지불하는 그 '댓가'에는 그들의 수고의 댓가만 들어가 있을 뿐, '고마움'이 빠져 있다. 우리 아이를 책임지는 책임교사가 무능하고 기가 죽은 사람이라면 우리 아이는 어떤 영향력 밑에서 자라가 될까. 실제로 아이와 함께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이 되면, 유치원 차에 아이를 실어 놓고 아이를 봐주는 유치원 선생님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듬뿍 들어간다. 항상 부족한 우리 아이가 그들의 손에서 더 건강하고 밝은 세계관을 가질 수 있도록 교사들이 긍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멀리서나마 응원해야 하는 것이 부모의 자세는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