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행'이라는 말은 근래에 들어 종종 들어보곤 한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역주행'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알고리즘'의 개념이 보편화 되고 난 뒤 부터다. 엄청나게 많은 정보는 서로 비슷한 키워드로 얽히고 섥히며 유기체처럼 연동하다가 특정 시기에 우연하게 다수에게 노출된다. 잊혀졌던 기록과 영상이 다시금 다수에게 노출됨으로써 타이밍의 문제로 묻혔던 진실들은 다시 표면 위로 솓아 난다. 블로그, 유튜브, 인스타 등 수많은 사람들이 쌓아놓은 데이터는 정보의 호수에 순식간에 묻힌다. 지금 이 글 또한 발행된 즉시, 일부 소수에게 소비되고 사라질 것이다. 숨겨져 있는 이런 데이터는 언제고 적절한 시기와 상황이 되면 불현듯 솟아난다. 이렇듯 알고리즘은 타이밍에 의해 묻혔던 진짜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제공하곤 한다. 개봉한지 10년이 넘은 조연 배우의 대사가 현 시대에 다시 유행이 되며 잊고 지내던 배우에게 제2의 기회를 주는 것처럼 소설은 우연한 기회에 추천 영상을 보게 된 한 직장인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참, 괜찮다.'라고 생각했던 영상이나 노래의 주인공이 죽었다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섬뜩하고 때론 씁쓸한 일이다. 0과 1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디지털 신호뿐인 실체에 우리는 '죽은자'의 묘한 채취와 흔적을 느낀다. 실제로 누군가 남긴 글과 영상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이런 시기의 역사는 30년도 되지 않는다. 이처럼 많은 정보 중 어떤 글과 영상이 산 사람의 것이고, 죽은 사람의 것인지 디지털 신호는 감지해 내지 못한다. 죽은자들의 생각과 흔적이 마음껏 온라인 상을 떠돌며 불현듯 불쑥 불쑥 우리의 삶에 나타날 것이다. 아마 30~40년만 지나도 온라인 상에서 검색되는 정보의 대다수는 죽은자들의 것으로 넘처날 것이고 우리는 감정 없는 '2진법 계산기'에 의해 죽은자들의 생각과 흔적을 끊임 없이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주인공 줏타는 밴드를 하고 있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노래는 우연하게 한 직장인에게 노출된다. 그것은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또다른 방향이 된다. 줏타가 죽기 전, 그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네트워크와 같이 얽히고 섥힌다. 한 음악이 완성되고 다른 누군가에게 갑작스럽게 소개된다. 온라인은 다시 오프라인으로 섥히고 얽힌다. 오프라인은 다시 온라인으로 얽힌다. 이런 역할을 하는 매개체로 소설은 '음악'을 택한다. 음악은 여러사람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영향력을 끼친다. 사람의 감정을 자극한다. 그리고 그것은 직간접적으로 여러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죽음은 과거의 죽음과는 다르다. 보통의 죽음은 모든 것이 사라진다. 장례를 통해 죽은이의 흔적을 지워주는 것은 죽은자에 대한 예의이자, 산 사람에 대한 배려다. 죽은자의 주변의 슬픔을 최대한 빨리 잊게 하기 위해 우리 조상들은 '장례식'이면 되려 술판과 도박을 하며 웃고 떠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죽은자의 흔적은 시간과 함께 사라져가며 죽은자는 산자의 적당한 추억이 되고 서서히 잊혀진다.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정확히 이런 정보화 사회에 대한 반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죽은 밴드의 주인공의 삶을 역으로 돌아보는 소설의 구성상 죽음의 가치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죽어서도 끊임없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생각을 전파하고 감정을 자극하며 살았을 때와 똑같은 활동을 하게 됐다. 어쩌면 철학적인 의미로 넘어갈 수도 있는 '영생'을 살게 되는지도 모른다.
줏타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그는 아이를 남긴다. 사람이 남기는 흔적이란 죽음으로 모두 지울 수 없는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아마 아이는 계속 자라나며 유튜브 속의 줏타의 나이까지 찰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 오면 아버지의 나이를 넘기게 될 것이고 온라인 속에서 늙지 않고 항상 청춘인 아버지를 평생을 바라보고 노파의 날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남기는 모든 글 또한 나의 죽음을 뒤로하고도 꽤 많은 사람들에게 알고리즘에 의해 노출되고 발간될 지도 모른다. 우리 아이가 내 나이를 넘어서며 내가 쓴 글을 보고 '한 젊은이의 글'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거대한 흐름 속에서 누구나 무언가를 포기한다. 그걸 어른이 된다는 말로 포장하며 태연하게 살아간다. 그런 법이다.' 소설 속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큰 흐름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을 포기하며 아무렇지 않은척 하는 것이고 말한다. 우리가 마주해야하는 큰 흐름이란 운명이며 우리가 어쩔 수 없는 큰 힘을 우리는 매순간 마주해야 하는 작은 입자에 불과하다. 정보의 바다가 출렁거리면서 의도하지 않는 순간, 나의 기록이 수면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영향력을 남기며 살아간다. 또한 소설의 말처럼 그것들을 포기하기도 한다. 이미 사라져버린 명곡들이 다시 역주행하며 순위권으로 언제든 올라가는 것처럼 어쩌면 알고리즘은 우리가 포기했던 것들에게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줄지도 모른다. 비록 그 기회가 죽음 이후라고 하더라도 분명 우리의 영향력은 조금도 노화되지 않고 변질되지 않으며 최초의 모습 그대로 유지할 것이다.
소설의 제목인 '잔잔한 파도에 빠지다'는 노래의 제목이다. 잔잔한 파도란 큰 바다가 만들어낸 일종의 출렁거림이다. 그것이 비록 멈춰 있는 것 같지만 적절하게 잔잔하게 움직인다. 바다는 엄청나게 방대한 부피와 질량을 갖고 있는 덩어리로 때로는 묵직하고 방대하지만 잔잔하게 흐르는 관대함도 가지고 있다. 소설은 일본 소설의 특유의 장점 처럼 술술 읽히고 쉽다. 책의 표지가 우리나라 수필같아 반전스럽기도 하다. 때론 자극적일 것 같고, 때론 잔잔한 이런 수필을 읽어보는 것도 좋은 듯 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