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준석 대표의 책을 읽고 쓴 리뷰가 네이버 메인에 등록되면서 꽤 많은 주목을 받았다. 사람들의 반응은 역시 두 가지로 나눠졌다. 이준석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이준석을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하지도 않는다. 사람의 능력이 필요할 때, 우리가 흔히 하는 실수는 본질을 잊는 것이다. A를 갖고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할 때, A를 갖고 있는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 이런 과정으로 A를 갖고 있는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이 좋다는 쪽으로 발전한다. 그 사람이라면 뭐든지 다 괜찮다는 식으로 전개는 우리 현대사회에 꽤 많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박정희 대통령인데, 그에 대한 언급은 여기선 하지 않겠다. 사실, 기업활동이나 정치활동이 특히 그런 쪽으로 빠지기 쉽다. 한 사람의 생각에 공감을 하게 됐을 때, 그 사람이 하는 다른 대부분의 것들이 옳다고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에 반감을 가질 때, 그 사람이 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렇다.
특히 우리사회는 진영논리에 쉽게 빠진다. 1949년 좌익 인사 교화 및 전향을 목적으로 조직된 '보도연맹'은 집단을 보면 우리는 알수 있따. 6.25전쟁 중에 우리는 이 지답단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민간인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당시 공무원들은 보도연맹 가입이 실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글을 모르던 민간인들을 상대로 무리하게 가입을 시켰다. 이에 대략적으로 10만명에서 30만명 정도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6.25전쟁 당시 우리의 인구가 2500만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대략 100명 중 한명이 무참하게 죽은 것이다. 당시 우리의 문맹률은 크게 낮았다. 집단은 본질을 잊기 굉장히 쉽다. 보도연맹 가입이 실적을 위해 이뤄졌는지 아닌지보다, 가입 당사자를 처단하는 것이 우선순위던 시기 많은 사람들은 무지의 댓가를 치뤘다. 이 기간 남북한을 합쳐 총 300만 명 가까이가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고 추정되는데 이는 2차세계대전 중의 민간인 사망자 비율보다 높다. 대부분의 사망자는 1950년 6월부터 12월 사이에 다량 발생했는데, 서울과 경기가 가장 많았다. 아이러니하게 한국군의 사망자는 총 62만명으로 군인보다 민간인 사상이 더 많이 발생했다.
사상검증은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도 꾸준하게 이어졌다. 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이유를 모르고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이처럼 우리는 '아군'과 '적군'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강요하는 사회를 살았다. '정병석' 작가의 '대한민국은 왜 무너지는가'라는 책에서 우리의 가장 큰 문제를 '신뢰와 법치의 부재'로 꼽았다. 책에서 말하길 우리는 상대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사회다. 역사적으로 그랬다. 조선말기 노론과 소론의 당파전쟁에서 그 두 붕당에는 상대의 정파가 집권을 했을 때 자신들이 멸문지화를 당할 거란 확신을 가졌다. 상대에 대한 신뢰의 부재는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고 날조된 정보로 상대의 위기를 만들어 공격하곤 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처럼, 생존을 위한 극단적 공격은 필수처럼 여겨지곤 한다. 진영논리가 심해지면 사회는 극단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곤 한다. 단지, 조국 전 장관의 지지자이기 때문에, 혹은 조국 전 장관의 반대파이기 때문에 그의 모든 이야기를 매도하거나 지지하거나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준석의 책을 올리고 꽤 많은 사람들이 '조국 책도 올리지 그래?'라고 물었다. 올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조국이기 때문에, 혹은 이준석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옳고 모든 것이 그르다는 믿음 자체가 잘못됐다. 우리는 오랜기간 영웅과 악당을 찾는다. 완벽하고 무결한 영웅의 존재나 완벽히 결점 투성이인 악당이 존재할 거라는 믿음으로 우리는 상대 진영과 우리 진영을 나눈다. 그런 이유로 어떤 책을 읽을 때, 글쓴이에 대한 맹신이나 무조건적인 의심은 옳지 못하다. 앞으로 남은 책들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읽어가면서 스스로 정보에 대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을 훈련시키도록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