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책] 본질의 중요성#6_독서가 완전하다는 착각
본질은 중요하다. 어떤 일에 있어 본질이 사라지고 행위만 남는 건, 우리 사회에 의외로 많다. '주간 회의'를 개최하는 회사는 많다. 본질은 상실하고 회의라는 행위만 남았을 때, 회사 운영에 필수적이었던 '효율'은 사라진다. '효율 극대화'를 위해 만들었던 문화에 '본질'이 사라지고 '행위'만 남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쉽게 '책을 읽어야 하는데...'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하지만 따지고 보자면 여기에는 '본질'이 없다.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책을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만 남았을 때, 우리는 불필요한 죄책감을 갖고 살아간다. 지식을 얻고 사색을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면, '독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밴자민 프랭클린'은 많은 책을 읽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는 '많이 읽는 것'을 권유함으로써, 독서보다 '지식 습득'과 '사색'에 촛점을 둬야 한다는 뜻이다.
소크라테스는 독서를 반대했다. 그는 '책읽기'보다는 '대화'를 많이 하라고 이야기 했다. 실제로 그는 집필활동보다는 강연을 많이 다녔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글을 읽는 방법이 아니라 많은 사람과 어울리고 만나며 직,간접적인 경험을 얻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책을 읽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라는 말을 믿으며 왜 그런지에 대해 인지가 없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자신이 왜 책을 읽는지 모른다. 실제로 이은성 작가의 '동의보감'이라는 책을 읽었을 때, 느낀점이 있다. 어린시절 MBC사극 드라마 '허준'을 보고 엄청난 광팬이 된 나는 지금도 드라마 허준을 종종 돌려보곤 한다. 시청각의 자극은 문자 자극보다 확실하기 때문에, 드라마를 보면서 얻게 된 역사적 사실과 배경은 줄줄 읊을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은성 작가의 '동의보감'은 어렴풋한 기억은 있지만 드라마 '허준' 처럼 명확한 자극이 있지는 않다.
독서가 완전한 해결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게 본질을 잃어 버린 경우가 많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완전한 것은 없다. 어떤 부분에서는 독서가 뛰어나고 어떤 분야에서는 시청각의 자극이 더 완전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직접 사람과 듣고 말하며 소통을 해야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직접 촉각을 통해 만져보고 느껴야 완전해 지기도 한다. 독서는 단순히 문자로 담겨진 정보를 읽어내는 그 이상의 의미도 아니다. 독서를 많이 한다고 좋은 프로게이머가 되는 것은 아니며, 다독을 할수록 좋은 축구선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문해력'은 분명 어떤 면에서는 중요하지만, 모든 면에서의 정답은 아니다. 단순히 '책'이라고 싸잡혀 있는 것에는 '소설'이라는 허구의 이야기와 '계발서', '인문', '과학', '역사', '경제' 등이 담겨져 있다. 이 분야의 다양성은 모두 각자 맡은 영역이 존재한다. 과학에 관한 호기심이 많은 사람에게 '경제학'의 책을 많이 읽으라는 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독서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독서의 본질은 '정보 습득'이다. 인류 탄생 이래로 통합의 역사를 살펴봤을 때, 인류가 정보를 저장하는 방법으로는 '소리', '영상', '문자' '그림'의 형태가 있다. 이 중 압도적인 비율로 '문자 정보'가 많다. 문자 정보를 빠르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더 쉽게 다양하고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처럼 문자를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는 근육을 키우는 방법으로는 '반복 훈련' 밖에 없다. 더 많은 바벨을 들어올리기 위해 수 백번 같은 훈련을 반복하는 일과 같이, 우리의 뇌는 근육과 같이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는 세포조직들의 덩어리일 뿐이다. 근육을 키우는 방법으로는 더 큰 외력을 통해 근손실을 일으키고 손상된 근섬유를 '단백질'을 채워 놓음으로써 더 크고 성장된 근육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근육이 커지는 과정은 뇌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외부자극을 통해 뇌를 자극하면 '뇌의 가소성'에 따라 뇌는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이처럼 다양한 정보를 흡수할 수 있는 '문자이해력'이 분명 다양한 정보를 흡수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정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글자를 모르는 어린 아이에게 '영상 매체'는 나쁠 것이라는 철학을 갖고 책으로 아이에게 말을 가르치려 한다면 아이의 언어 습득 능력은 터무니없이 느려질 것이다.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의 능력은 전혀 다른 능력이다. 듣기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선, 듣는 훈련이 필요하고, 말하는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선 말하는 능력이 필요하며, 쓰는 능력을 위해선 쓰는 연습이 필요하다. 많이 읽으면 많이 듣을 수 있고 말을 잘할 수 있으며, 잘 쓸 수 있다는 착각 때문에 우리의 현재 교육은 커다란 문제를 낳고 있다. 2010년 한국에서 개최된 G20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특별히 한국 기자에게 질문의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기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질문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질문해 본 적 없는 수동적인 학습 방식의 병폐다.
왼쪽으로만 커다란 바퀴는 앞으로 달릴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균형적인 바퀴의 크기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독서를 강조하는 이유는 이미 우리를 앞으로 굴릴 수 있는 '독서력'이라는 바퀴가 쪼그라져 들었기 때문이지, 이 바퀴만 비대해졌다고 전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책을 읽는 습관은 몹시 좋다. 하지만 책을 읽기만 하는 행동은 불균형한 바퀴를 갖기를 희망할 뿐이다. 균형적이고 건강한 능력을 갖기 위해선, 읽은 책을 사색하고 그 읽은 책에 대해 자신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을 글로 표현해보고 다른 사람의 의견도 귀를 기울이는 균형적인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행동하지 않은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최후의 완성은 또한 그 지식을 활용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것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독서는 중요하다. 하지만 독서의 본질은 그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며, 그런 독서는 응원 받거나 칭찬받을 일도 아니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책을 읽지 않는다고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며 책을 읽는다고 훌륭해지는 것 또한 아니다.
듣고, 말하고, 읽고, 쓰고... 모든 영역을 골고루 익숙하도록 훈련하고 결국 행동할 수 있어야 하며, 굳이 따져 말하자면 독서의 본질이란, 그저 취향이고 기호일 뿐이다. 결코, 지적이거나 고상한 취미도 아니고 자부심 가져야 할 사항도 아니며 멋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