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스물, 유학을 처음 갔을 때 이후로 소액이나마 꾸준하게 기부를 하고 있다. 유니세프를 비롯해 여러가지 기관을 통해 돕기도 하고, 인터넷 기부나 오프라인 기부도 종종 했다. 막연하게 내가 모르고 지은 죄에 대한 죄책감을 덜기 위한 일종의 '고시레'라고 본다. 이타적인 마음이나 '선의'는 없다. 그것은 분명하다. 오랜 기간 누군가를 돕는다는 착각에 빠져 살다보면 내가 사회에 이로운 사람이라는 자기기만에 빠진다. 그리고 나름의 기부철학이 생긴다. 그것은 '가난하거나 불쌍한 사람을 돕지 말자'다. 병에 걸렸거나 곧 죽음을 앞두고 있거나, 가난하거나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은 과연 선행일까. 철학적인 고민을 한 적이 있다. 아는 친구와 오랫만에 통화를 했다. 친구는 누군가를 돕는 것은 철저한 이기심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공감했다. 만약 내 소액으로 수명을 연명한 이가, 그저 가난한 절도범이라면 나는 누구를 도운 것일까. 가끔 가난하거나 불쌍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인 것 같은 착오에 빠지게 된다. 사회와 타인들을 위해 긍정적인 변화를끼치는 이들을 돕는 것은 선행에 속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악한 사람'을 돕는 것은 '악행'에 속한다. 살다보면 타인에게 폐를 끼치며 살면서 얌체같은 부류가 있다.
군대에서 단체 생활을 할 때, 내가 덜 움직이면 상대가 더 힘들 것이란 걸 반드시 안다. 그러에도 불구하고 온갖 핑계로 열외를 하는 경우가 있다. 상대에게 폐를 끼치면서 그 폐가 집단 전체로 확산되도록 만드는 나쁜 사람들은 멀리서 보기에는 티가 나지 않는다. 우리는 열과 성을 다하여 의무에 책임을 다하는 군인과 그렇지 않은 이를 모두 같은 묶음으로 둔다. '아프리카의 누군가를 돕는다, 북한의 누군가를 돕는다, 인도의 누군가를 돕는다.' 이를 모두 선행으로 보기 어렵다. 단순히 일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 선택한 자발적 가난에 동감하고 싶지 않다. 이런 생각은 분명 다른 피해자를 만든다. 정말 가난하지만 선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을 돕는 것은 필수적이다. 간혹 선하지 않더라도 악하지 않는 사람은 도울 필요가 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자면 세상을 이롭게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선행'이라고 볼 때, 멀리서 정체성이 불확신한 가난한 이들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일은 막연하고도 막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선행이란 사회의 긍정의 영향을 끼치는 행위다. 단지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진짜 선행에 속한다고 본다.
자신의 일에 태만한 소방관이나, 업무를 방관하는 공무원이 고작 얼마의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자동이체'했다는 것만으로 선한 사람으로 분류되서는 안된다. 가장 기본기가 탄탄한 이가 실력자라는 말처럼 자신의 직업에 열의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선이다. 선생님은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아이를 교육하는 것이 '선행'이고, 버스기사는 최선을 다하여 안전운행을 하는 것이 '선행'이다. 지난해 12월 만기 출소한 조두순은 올 2월 기초생활 수급자 생계 급여 심사를 통과하여 매달 120만원의 수급을 받는다. 그는 '부자'는 아니다. 그는 가난한 자이며 국가의 도움을 받고 생활을 해야하고, 노약한 나이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이제 곧 70이 될 노인이다. 과연 누군가를 돕는 다는 '선행'의 명분으로 기초생활수급자 노인을 돕는 일에 만족을 한다면 나는 사회에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이 달에도 내 계좌에서 자동으로 얼마의 금액이 기부된다. 이것은 '선행'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선행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기부를 하는 이유는 내 본업에 대한 최선을 다했는지의 의문을 항상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답이 없는 사회생활에서 내가 하는 일에 확신이 불확실하기에 역설적으로 나는 악행인지, 선행인지 모를 일을 하고 있다. 어쩌면 선행인지, 악행인지 모를 이 행위를 멈추기 위해서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만족할 수 있는 지경에 이러야 한다. 좋은 회사에 투자하고 내 직업에 최선을 다하며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일을 만족하게 된다면 가식적인 선행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