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에 빠진 남편', '술을 좋아하고 항상 늦은 시간까지 밖을 돌아다니는 남편'. 여성은 남편의 고쳐지지 않는 도박과 술버릇으로 골머리를 앓는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갈등이 발생한다. 아내는 남편에게 커다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도박을 즐겨하는 남편의 나쁜 습관과 술을 좋아하고 항상 늦게까지 밖을 돌아다니는 나쁜 버릇에 속이 썩을 만큼 썩었다고 말한다.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음을 인식한 아내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이혼의 유책이 남편에게 있다고 한다. 법적인 유책을 찾는다면 남편에게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부부의 실제 이혼 사유는 '남편'이 아니다. 남편에게는 죄가 없다. 이 부부의 이혼 사유는 '공감 부족'이다. 만약 아내가 함께 도박에 빠져있고 술을 좋아하며 함께 늦은 시간까지 밖을 돌아다닌다면 이 둘은 '천생연분'이 된다. 경제적으로 파산이 되거나 몸 건강이 나빠지는 일을 차치하고 부부 사이는 매우 좋을 수 밖에 없다. 혐오의 반의어는 '사랑'이라고 한다. 자신과 닮지않음에는 혐오의 감정이 생기고, 자신과 닮음에는 사랑의 감정이 생긴다. 세상에는 고양이를 끔찍히 좋아하는 부류도 있지만 고양이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부류가 있다. 매콤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매운 맛을 극도로 꺼려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자신과 공감대를 형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유대감을 갖는다. 또한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이질감을 갖는다. 그렇게 공감과 사랑의 파이가 커지면 반댓쪽에서는 혐오의 파이도 함께 커진다.
해외에서 10년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언어'는 나의 장애물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도 '원어민'과 비즈니스하고 생활해야하는데 모르는 단어나 깊이있는 대화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같은 조건으로 한국에오니 '언어'는 나의 강점이 됐다.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주변 환경이 달라질 뿐이다. 혐오는 특별한 이들에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라도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크기가 커지기도 한다. 독일계 미국인 정치 철학자인 '안나 아렌트'는 1963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당연하고 일상을 살던 폄범한 사람이 하는 일들이 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굉장히 나쁜 사람들이 자행할 것 같은 혐오의 감정은 사실상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생겨난다. 1960년 이스라엘의 첩보기관이 나치의 친위대 장교이자 홀로코스트 실무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을 체포하여 기소했다. 이후 공개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사악한 악마가 아니라 몹시 친절하고 평범한 공무원이었을 뿐이었다. 어떤 특별한 이들이 악을 저지를 것이라는 생각은 생각보다 쉽게 깨진다. 단순히 조국을 위한 애국을 행하던 공무원은 상황에 따라 반댓쪽에서는 악의 상징이 된다. 조국에 충성도가 강할수록 이런 감정은 커진다.
내부적 결속이 잘 된다는 것은 '외부에 대한 혐오 감정' 또한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체로 독재정권이나 전체주의 국가들은 내부적 결속이 뛰어났고 외부에 대한 혐오도 함께 켜졌다. 자신과 닮아 있는 것들에 대해 결속하고 다른 것에 이질감을 느끼는 것이다. 어린 시절 '한민족'이라는 교육을 받았다. 이런 교육은 혼혈에 의해 '한민족'이라는 순수함이 오염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곤 했다. 어린 시절 받은 이런 교육은 한민족으로의 결속을 다진다. 또한 이민자에 대해 철저하게 경계한다. 우리의 인구가 비교적 작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15억 중국인들을 보면 실제로 매우 결속이 잘 돼있다. 우리의 역사에서 혐오의 감정이 결속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적잖이 있었다. 정치인들은 떨어진 지지율을 급하게 올리기 위해 '일본'과 '북한'을 바꿔가며 이벤트를 진행했다. 이벤트는 혐오를 조장할수록 지지율이 올라갔다. 나치 또한 내부 결속을 위해 외부의 적이 필요했다. 망가진 독일의 경제에서 유일하게 대금업을 하며 부를 쌓아올리던 유대인이 그 표적이 됐다. 일본 관동지진에서도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갔다.
'악'처럼 보이는 이런 '혐오'의 감정은 사실상 '사랑'이다. 내부적 사랑의 크기가 커지면 그만큼 혐오의 감정은 커지기 마련이다. 인간은 대체로 자신과 다른 이를 경계하려고 한다. 페루 남부의 잉카제국은 스페인 군대가 침공해왔을 때, 처음에는 손님을 환영하기 위해 마중나가기도 했다. 이런 환영의 끝에 잉카제국은 멸망했다. 인간에게 '혐오'란 '경계'를 의미하고 꽤 긴 시간 동안 이런 경계는 우리의 생명을 살려냈다. 혹여 잉카제국과 같이 '혐오'의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 이들은 빠르게 멸망하여 그 유전자를 후대에 넘기지 못했으니, 혐오의 감정이 극심한 생존자들의 자손인 우리의 유전자 또한 혐오의 감정이 없을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가 다 다르다. 혐오의 감정은 힘의 균형이 엇비슷할 때는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 서로 견제하며 평화를 유지하는 천하삼분지계처럼 작동한다. 하지만 이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이 오면 혐오의 감정은 노골적이게 된다. 상대적 다수는 상대적 소수에게 노골적인 표현과 행동을 취한다. 이런 행동들은 다수에 대한 결집을 돕는다.
누구나 강점과 단점이 있다. 나는 한국인이다. 주변에 한국인이 많은 환경에서는 내가 절대적 다수가 되지만, 제주도 출신이다. 절대 다수가 서울 출신인 한국에서 제주는 소수에 속한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내가 다수다. 나는 책을 좋아하지만, 책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 사이에서 절대적 소수다. 하지만 서점에서는 내가 절대적 다수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소수이자 약자이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다수이자 강자이다. 우리가 강한 부분과 다수인 부분에서 혐오의 감정을 나타내면 반드시 다른 부분에서 소수이자 약자로서의 불이익을 얻을 것이다. 이는 어쩌면 사라지지 않은 감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를 의식하고 교육하는 것과 전혀 무지하고 살아가는 것은 굉장히 다른 일이다. 혐오의 감정이 사랑의 감정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이 아이러니함은 다양한 관점에서 알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혐오한다면 우리는 그와 다를 뿐이다. 단지 내가 그와 다를 뿐이라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충분히 내 의지로 그와 닮아지는 노력을 통해 바꿀 수 있다. 이는 나의 잘못일 수도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