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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Dec 31. 2021

[생각] 자본주의는 어디로 가는가_미래는 어떻게 될까

 자본주의는 사유재산제를 바탕으로 이윤을 얻는 경제 체제다. 개인이나 법인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처분권과 고용, 통제를 보장한다. 사회주의의 특징은 국가가 투자와 통제, 산업 자산을 소유하는 것이다. 냉전체제라고 부르는 시기에 왜 사회주의진영과 자본주의진영은 대립되었는가. 아주 오래 전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은 사회안정에 필수 요인이었다. 쿠데타나 반란 등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예로부터 '왕권강화'라는 중앙집권체제는 필수적이었다. 이러다보니 국가는 개인에게 '사유재산'과 '권력양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조선의 경우는 '무역' 행위 자체가 '반역'에 속하여 사형에 이르는 중형을 받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는 견제와 균형을 통해 민주주의도 사회안정을 통제할 수 있지만, 민주주의는 오른쪽 페달과 왼쪽 페달을 번갈으며 밟아 진행하는 위태하고 통제가 어려운 체제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국가의 주권을 국민에게 양도하여 국민의 대표로 하여금 다투게 한다. 흔히 우리 정치가 '시끄럽다'라고 욕을 하지만,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러워야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다.'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항상 싸우고 다투고 견제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올바르게 가는 길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사유재산을 보장한다. 국가는 국민의 권리를 최대한 인정하고 권익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사회주의는 반대로 그 일련의 과정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민의 권익을 인정하지 않는 민주주의 국가는 체제의 위협을 받고, 국민의 권익을 인정한 사회주의 국가는 반대로 그 체제의 위협을 받는다.

 세계 대공황을 보면 자본주의의 취약점을 알 수 있다. 시장이 공급조절에 실패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시장은 공급과잉에 대처하지 못했다. 자본주의의 약점은 여실하게 들어났다. '세계대공황'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당시 소련의 GDP는 안정적으로 우상향하고 있었다. 세계가 사회진영으로 바뀔 경우, 자유진영은 수출에 커다란 타격을 받는다. 국가가 경제를 통제하는 국가에서는 자유로운 비즈니스가 있기 어렵다. 미국은 시장 확대를 위해 사회주의 진영의 확장을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다. 반면, 사회주의에서 자유진영의 확대는 '사회 안정'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심지어 소련은 연방국가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본주의의 문제를 분명하게 확인했다. 심지어 자본주의는 '뉴딜'이라는 이름의 정책을 대공황 극복을 위해 진행했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사회주의 정책을 일부 받아들인 것이다. 지금에 와서야 우리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자택일에서 어떤 곳을 선택해야 할지 명확해 보이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세계대공황 이후 동유럽 국가들에게 '사회주의 체제'에 굉장한 매력을 느꼈다. 심지어 미국마저 일부 자본주의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회주의 정책을 취했다는 점에서 그 매력은 체제 경쟁으로 돌입됐다. 민주주의 국가의 '법인'과 '개인'은 끊임없이 자신의 권익을 확장하고자 한다. 그들은 자국을 넘어 무역으로 수익 확장이 필수적이다. 자본주의는 무한대로 공급을 해야 경제체제가 유지할 수 있다.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잠시 쉬는 공장은 존재할 수 없다. 무한대로 공급하고 다시 무한대로 소비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위태롭게 달리던 자전거가 속도가 줄어들다 넘어지는 것처럼 위태롭게 된다.

 그들은 '사회주의' 국가에 시장개방을 요구한다. 자유무역은 산업혁명 이후 쏟아져 나오는 공급물량을 소비 시킬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자신들이 필요한만큼만 국가 주도에 의해 생산해 사용하는 사회주의에 비해 자본주의는 조급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생산과 공급의 균형에 따라 경제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념으로 부딪쳐 한반도에 대리전쟁이 일어나게 됐다. 청일전쟁과 한반도전쟁이라는 당시 패권전쟁이 안타깝게 이 땅에서 일어난 것이다. 1950년대 소련 경제는 세계 2위의 공업 경제였다. 미국보다 먼저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발사할 만큼 경제와 기술적인 성취를 이룬 소련은 어째서 무너지기 시작했을까. 미국과 소련의 경제력 차는 분명하게 있었으나 무제한 생산하는 자본주의와 통제된 생산량을 유지하는 사회주의 간의 차이는 당시에 납득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다 문제가 발생했다. 1986년 4월 26일 오전 1시 23분, 소련은 정전 시, 비상전력 공급이 얼마나 가능한지 실험을 진행했다. 소련이 인공위성을 미국보다 먼저 보낼 수 있던 이유는 사회주의의 자랑이던 "목표 조기달성"이라는 사회주의 특유의 장점 때문이었다. 그들은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장치에 대한 실험을 하고자 했다. 원자로의 가동이 중단될 경우에, 발생하던 터빈의 관성으로 얼마의 전기를 더 생산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이는 자신들의 안전장치가 완비 됐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실험이었다.

 이런 위에서 아래로의 지휘로 이뤄지는 실험은 거대한 재앙을 만들었다. 보여주기식 성과를 통해 집단에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사회주의 구조 특징은 '체르노빌 사건'을 만들어 냈다. 체르노빌에 후속 조치는 더 참담했다. 사고 원인과 대책, 수습과정은 말 그대로 사회에 의해 철저하게 지휘됐다. 사고 5년 후, 사회주의 연방 국가인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은 그렇게 해체돼었다.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지만 그 산업구조상 사회주의 국가는 식민지를 건설하지 않는다. 공급과잉에 시달리는 자본주의는 항상 수요를 필요로 하고 더 큰 시장을 필요로 했다. 자유무역의 확장을 통해 자신들의 공급물량을 더 빨리 소비시켜야 했다. '청교도'의 국가인 미국이 '자본주의체제'를 채택하면서 미국은 '소비'의 나라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이했다. 더 많이 쓰고, 다 많이 먹고, 더 많이 하는 무한 소비의 시대를 열었던 자본주의는 자원을 소비하고 고갈하고 낭비하고 버렸다. 그러다 2017년 1월 9일, 애플의 공식 행사에서 당시 애플의 CEO인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이라는 획기적인 물품을 선보였다. 이후로 사람들은 '식품'이나 '의류'가 아닌 '무형의 온라인 공급품'을 소비했다. 자원을 고갈시키지도 않으며, 이미 배가 부른 사람들의 목구멍으로 소화제와 같은 콜라를 밀어넣어 비만을 양산할 필요도 없어졌다. 사람들은 무형의 어떤 것에 기꺼이 돈을 내며, 게임과 영상과 같은 컨텐츠에 돈을 밀어넣기 시작했다.

 끝으로 몰려가던 자본주의는 새로운 해결책을 찾았다. 공급의 폭발적 확산으로 더이상 세계대공황이 일어날 필요도 없었다. 사람들은 비만이 되지도 않았고 값싼 패션을 옮겨다니는 일에 '유행'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도 않았다. 의미 없이 '여행'이라는 소비로 돈을 쓰게 할 필요도 없었다. 공급력 폭발은 말 그대로 존재하기 힘들었다. 다만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독점'이다. 온라인 플랫폼의 특성상, 공급자와 사용자 양측 간의 균형적인 성장이 이뤄져야 하고 이로 인해 이용 빈도가 높은 한 플랫폼으로 쏠림현상이 일어났다. 독점적 기업들이 세계적 기업으로 변하고 일부 기업들은 국가 규모를 넘어서는 시가총액을 자랑하기도 한다. 경제 체제만 놓고 보자면, 기업활동은 '자본주의 내의 작은 사회주의'다. 경제활동에서 진정한 자본주의는 '인플루언서'나 '프리랜서'처럼 개인의 능력대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들이다. 사회주의가 극단적 성과주의를 만들어내며 그 모순으로 끝난다. 현대에는 그린뉴딜나 양적완화처럼 큰정부를 원하는 추세다. 자본주의는 예전의 모습을 잃고 사회주의와 적절하게 섞이며 진화해왔다. 현대의 자본주의는 실제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적절한 혼종이다. 이제 우리는 '코로나 경제'를 살고 있다. 국가는 '코로나 지원금'을 명분으로 시장에 직접 개입하고 사회의 안정을 위해, 일부 개인의 자유는 억압해도 괜찮다는 사회분위기가 일어나고 있다.

 엘리트 관료주의가 합리적인 정치방식이라는 젊은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몰지각한 대중은 쉽게 선동되며 일부 엘리트에 의해 통치 해야한다는 전제주의적이적 생각들이 다시 생겨난다. 친환경 산업과 같이 사회가 공동의 목적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는 인식이 커져 나면서, 자본주의가 점차 그 모양을 변화해 가고 있다. 고전적 의미의 자본주의는 이미 그 수명을 다했다. 이제와서는 '기본소득'과 같은 이야기가 현실 정치권에서도 흘러나오고 있다. 생산없는 공급에 대한 대안으로 현대 사회는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우리는 4차 산업혁명에서 인공지능에 의해 직업을 잃을지 모르는 불안감을 갖기보다, 사회체제의 변화로 노동자체가 사라지는 시대를 기다려야 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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