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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Mar 10. 2022

[수필] 수험기간 피하지 못한 '깊은 밤'이 찾아온

1년만 더 해볼게요

"Winning means being unafraid to lose." - Fran Tarkenton

(이기는 것은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는 '성공'과 '실패' 중 더 흔하게 '실패'가 산재돼 있다. 유독 나에게만 그것이 찾아왔다고 느끼는 이들 중 대부분은 '실패'를 온전하게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성공에 이른 이들을 바라보면, 그들에 비해 나에게만 찾아온 실패가 씁쓸할 때가 있다. 예전 한 기자가 이미 2만 5000번이나 실패한 사업가를 찾아가 물었다. "벌써 2만 5천번이나 실패를 하셨는데... 지금 하시는 실험을 계속하실 건가요?" 그라자 사업가는 대답했다. "실패라니요. 나는 실패를 한 게 아니라, 성공에 도달하지 않는 2만5천 가지의 방법을 알아낸 거에요." 그 사업가는 전기배터리 실험을 하던 에디슨이었다. 실패는 성공보다 흔하디, 흔한 현상이다. 확률적으로 더 자주 발생하고 더 넓은 곳에 포진돼 있으며, 누구를 따지지 않고 들이닥친다. 갑작스럽게 성공을 이루는 행운도 분명 좋지만, 실패를 맞이하는 자세는 그래서 중요하다. '실패'가 더 빈번하다는 사실은 대게 '성공'을 이르는데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성공과 실패는 그 성향이 매우 다르기에, 같은 부류라고 여겨지나, 성공은 '결과'이고 실패는 '과정'이다. 성공은 그것으로 마무리되지만, 수많은 실패 뒤에는 다시 '성공'과 '실패'의 기로가 들어선다. 그거에 다시 '실패'를 맞닥드려도 다시 '성공'과 '실패'의 기로는 들어선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말없는 나의 입을 기다릴 때가 많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무언가 대단한 것을 감추고 있다고 여기는지, 나에게 종종 '고민'을 털어 놓곤한다. '남의 일'에 생각없이 한마디 '툭'하도 던지고 나면 내가 뱉은 생각없던 무의식의 말이 다시 나를 자극할 때가 있다.


 "만약, 안되면 어쩌지?" 나보다 상급자가 나에게 물었다.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나는 대답했다. "될때까지 할텐데 안 될 때를 대비할 필요가 왜 있나요?" 사람은 적당한 순간에 포기해야하기도 한다. 미련을 두고 의미없는 도전을 하는 것또 굉장한 위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이 통용되지 않는 상황이 반드시 존재한다. 넘지 않고서는 아무런 진행이 되지 않는 상황들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럴 때 '안되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은 불필요한 고민을 하게 한다. 실제 안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이 없다. '다시하거나', '그만하거나' 대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선택옵션을 물어보면, 말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경우들이 많다. '그만하세요.'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러면...이래 저래서 안되는데요'. 그들에게 그럼 '다시하세요'라고 말한다. 그럼 그들은 다시 대답한다. '그러면.. 이래 저래서 안되는데요.' 이래도 문제고 저래도 문제인 상황에 '고민상담자'는 역할을 잃는다. 이런 고민은 '실패할까봐 두렵다'라는 가정이 들어가 있다. 여기에 가장 큰 문제는 그 두려움이 '가정'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 가정이라는 것도 사실상 엄청나게 확률 높게 들어 맞을 가능성이 있다. 어떤 일을 할 때, 우리는 성공과 실패의 가능성을 50%로 본다. 그러기에 두려움을 갖는다. 우리 누구는 그 누구라고 하더라도 로또복권을 사면서, 당첨되지 않을 확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당첨되지 않을 너무나도 '당연한 확률'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당신의 실패에 '거봐  그럴 줄 알았다'라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원래 실패는 아주 흔한 일이며, 성공이 아주 극적인 일이다. 실패할 확률을 맞추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다. 실패를 예상한 이들의 적중률이 높아진다고 하더라도 그의 선견지명에 놀랄 이유도, 나의 한계를 결정 지을 이유도 없다.


 당신이 도전하는 일에 실패할 확률은 99%다. 당신이 맞이 할 미래에서 얻고자 한 댓가를 얻지 못할 확률이 99%라는 것이다. 이 말이 저주라고 느껴진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우리가 세운 목표가 굉장히 합리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수능 점수를 1등급 올리거나, 건강하고 보기 좋은 몸을 만들기 위해 5kg을 감량한다거나, 원하는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 조금 더, 조금더 성장하거나. 하지만 사실상, '현재'의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이미 최선을 도달한 상태다.' 이 최선을 넘어가는 1g의 목적도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당신이 만들어낸 목표에 도달할 확률이 더 극하게 말하자면 99.99% 쯤은 된다. 이제 우리가 실패할 여지가 당연해졌다. 그럼 다시 도전해보자. 그리고 실패해보자.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0.001%의 확률에 들어서려고 하기 때문이다. 1만 분의 1의 확률이 성공의 확률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도전을 2회하기만 해도 그 확률은 5천 분의 1로 줄어든다. 다시 3회를 하게 되면, 3333분의 1로, 4회를 하게되면 2000분의 1로 줄어든다. 실패에 '도전'이라는 대응을, '장군', '멍군' 식으로 무감정 대입하기만 하더라도 성공의 확률은 '복리'로 늘어난다. 우리가 어떤 것을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느냐'는 결국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다. 실패를 행복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그리고 그 실패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은, 문제를 바라 볼 때, 감정을 배제시킨다. 실패도 즐겁게 맞이한다. 소설가 김영하 님은 글을 쓰기 위해 '중국'에 입국하는 과정에서 간단한 서류상의 문제로 다시 돌아 온 적이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화가 날 법한 상황에 김영하 작가 님은 '글쓰기 좋은 소재가 됐다'고 여기고 말았다. '내가 두 번 다시 중국을 들어가나 봐라'보다 편안하게 다음에 중국행 비행기를 끊을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사람이 그곳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림 작가 님은 입시의 실패를 맞이하고 '반수' 생활을 시작한다. 대학을 입학하고서 다시 대입을 준비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꾸준한 실패를 맞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한다. 물론 실패에 괴로워하고 힘들어 했다는 것 쯤은 여전히 알 수 있다. 다만, '나는 해도 안돼'가 아니라 현명하게 어느정도는 현실과 타협해가면서 원하는 목표를 이뤄낸다. 우리는 아주 사소하게 정해 놓은 목표를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어제의 나와 달라지는 아주 작은 성취라도 결코 당연한 것은 없다. 그녀는 대학생활 중 과외와 대학생활과 수험생활을 하며 적당히 타협하고 아주 조금씩 자신을 성장시켰다. 실패할 여지도 충분히 둔다. 그녀는 결국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을 통해 '교대'를 입학하 수 있었고 지금은 다시 새로운 도전을 통해 성장하고 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젊은 이들에게 굉장히 고민이 될 법한 이야기다. 주변 어디서나 있는 이야기고 실제로 모두가 수험생활을 하며 일정한 '패배자'를 양산해내는 대한민국 '입시'와 '고시'에서 누구나 겪는 일이다. 그녀의 프로필을 살펴보다보니 '너를 영어 1등급으로 만들어주마'라는 도서가 보였다. 단순히 태어나서 부터 영어가 능통했다는 '원어민'의 영어 공부법이 아니라, 불완전하여 실패를 거듭했던 이에게 축척된 성공과 실패 데이터가 축척된 새로운 책에 호기심이 일어났다. 그녀는 스스로 '이과적'이라고 했으나, 그녀의 문체는 깔끔하고 보기 편하고 따뜻하다. 그녀가 '이과적'인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출판업에 종사하는, 그리고 글을 쓰는 '문과적' 인간 이라는 사실은 여실하게 글에서 들어난다. 대한민국 많은 수험생들이 읽기를 희망하는 글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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