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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May 16. 2022

[계발] 본질의 중요성#9_드디어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니체에 따르면 사람의 단계는 3단계가 된다. 하나는 낙타 다른 하나는 사자, 마지막 단계는 어린이다. 쉽게 '낙타'는 엄청나게 무거운 짐을 실어 주고 걷기를 시키면 시키는대로 묵묵하게 따른다. 자신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 부다을 아무리 지어주더라도 묵묵하게 그 일을 수행한다. '사자'는 그에 반항한다.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일에 대해 저항하고 반항한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반항과 저항을 한다. 마지막은 '어린이'다. 어린이는 '놀이'로써 창조하고 자신만의 가치를 새롭게 만든다. 즐기고 긍정하고 독립적이며 반항도 가능하다. '즐거움'을 추구하고 '놀이'로 승화하는 과정에서 '긍정'적인 부차적 성과가 나오기 나따름이다. 위버멘쉬(übermensch)란 넘어서다(über)와 사람(mensch)의 합성어다. '초월한 사람', '초인'과 같은 말을 의미한다.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말은 얼핏 도덕적인 지탄을 받기 쉽지만 그것은 인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기적이며 자신의 이익에 최선을 다한다. '아름다운 이야기'로 포장되는 '이타적인 사람'은 동화 속에서 존재한다. 다만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렵다. 즉각적인 성과와 보상이 스스로에게 있지 않다면 대부분의 것들은 지속가능하지 못하다. 가령 월 200만원을 버는 사람이 월 190만원을 기부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이타적인 사람은 길게 수 개월 생활을 지속할지 모르지만 언젠가 이 일을 멈추게 될 것이다. 다만 200만원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취미 활동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취미활동을 하는 사람과 기부를 하는 사람은 분명 지속성에서 차이가 생긴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고 재밌어하는 일에 지속성을 갖는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편안함'을 추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가령 서 있는 사람과 누워 있는 사람 중 누가 오랫동안 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을까. 서 있는 사람은 앉고 싶어지고 앉아 있는 사람은 눕고 싶어한다. 밥을 먹고 배가 부르면 식곤증이 몰려와 잠을 자고 싶어진다.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사람은 내려와 땅에 있고 싶어하고 걷고 있는 사람은 쉬고 싶어하며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놓고 싶어한다.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쉬운 것'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처럼 모두가 쉬운 방향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 반대를 거스르는 사람은 '희귀종'이 된다. 모두가 눕고 싶어할 때 운동을 하거나, 모두가 먹고 싶어 할 때 굶거나 모두가 자고 싶어 할 때, 일어나거나 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기본적으로 DNA에 새겨진 편한 방향으로의 설계를 거슬러야 한다. 이런 비자연적인 일을 하기 위해선 '반드시' 개인에게 이익이 있어야 한다. 공공이 이익을 나누는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사유재산을 인정했던 '자본주의'가 세상의 주류가 된 것도 지극한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비자연적인 현상'이다. 능동적으로 글에 쓰여진 의미를 파악하고 이해하려고 달려드는 일 보다 생각없이 '멍'하게 스마트폰을 바라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자연스러운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왜 그 일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이기적인 명분'이 있어야 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는 '학력'에 대한 비정상적일 만큼의 '신임'을 가졌다. 학력 좋은 사람에 대해 바라보는 시선과 평가가 분명하게 있었다. 사회는 그들에게 그만한 댓가를 주기도 했다. 다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인구가 줄어들면서 '대학'에 들어가기가 한결 수월해졌고 '대학 졸업장'이 없어도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널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해야하는 이유는 '성취하는 방법'에 대한 '단련'이다.

 성장은 무한대로 커나가는 것이 아니다. 수축과 팽창이 주기적으로 반복하면서 내부적으로 단단하게 다지며 강도를 높여 커 나가는 것이다. 블록을 높게 쌓기 위해서는 블록을 윗쪽으로 쌓기만 해서는 안된다. 의미가 없어 보일지 모르는 하단부를 탄탄하게 할 수록 결국 더 높게 쌓을 수 있다. 그저 하늘 쪽으로 벽돌을 쌓아 올렸다면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이처럼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결국 성장과 별로 관련없어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성공'만이 쌓여 있어서는 안된다. '목표'와 관련 없어 보이는 '실패'라고 할지라도 피라미드의 하단부처럼 단단하게 하부를 지탱하는 것이다. 하단부가 넓어지면 피라미드의 높이는 더 높고 단단해진다. 문제를 풀고 틀린다는 것은, 문제를 단방에 맞추는 것보다 중요하다. 틀린 문제는 자신의 취약점을 발견하게 해주고 자신의 취약점을 보완할 여지를 만들어준다. '시험공부'는 '본질(개념)'을 단단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시험(문제)'해보며 '실패(틀린 문제)'를 고민하여 '보완(오답노트)'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공부법'이 아니라 '목표에 도달하는 법'이다. 공부, 요리, 운동을 비롯해 거의 대부분의 것들은 앞서 말한, 본질파악, 시험, 실패, 보완의 과정을 겪어 성장한다. 학창시절 성적표는 '대학교 이름' 따위를 바꾸는 목적이 아니라 스스로를 자기계발할 수 있는 좋은 훈련과정이다. 그까짓 대학교 이름이나 성적따위는 요즘 세상에 '그까지것' 쯤이다. 명문대학교를 입학한 학생들이 재학 도중 자퇴를 하고 창업하여 성공하는 경우는 적잖다. 미국이나 우리 대한민국에서도 대학졸업장과 상관없이 명문대 출신 '부자순위' 상위에 이런 이들이 상당하게 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여 좋은 명분이나 이름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본인의 성장을 위한 이런 이기적인 욕심은 반드시 성장을 지속시킨다.

 세상 공짜 좋은 정보가 판치는 요즘 세상에 공부법이나 좋은 강연은 인터넷에 키워드 몇 자 적어 얼마든지 검색 가능하다. 그런 '기술(스킬)'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대하는 철학이 필요하다. 공부는 왜 해야하는지도 납득이 되지 않는 이들에게 공부하지 않냐고 잔소리하는 것은 난데없이 지금 당장 '지금 도로로 나가서 만세 3창 하고 오세요'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만약 난데없이 도로로 나가서 만세 3창을 하라고 한다면 되물을 것이다. "왜요?" '왜'가 해결되지 않은 행동은 그 누구도 하지 않는다. '왜'가 해결되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려 본질이 없는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는 이유는 '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고로 당연한 일이다. 부모나 친구, 주변 선생님이 시킨다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위보멘쉬에서 '낙타'와 다름없다. 시키면 시키는대로 자신의 철학이나 의지없이 무거운 짐을 얼마든지 날라주는 것과 다름없다.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을 깨닫는다면 드디어 공부가 하고 싶어질 것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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