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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Jul 14. 2022

[생각]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워지는 탁월한 노하우

대인배가 되는 법

 얼마 전 읽었던 '컨텀 라이프'의 저자 '하킴 올루세이'는 말했다. 

"마음이 복잡할 때, 주변을 센다." 흔히 '너드(nerd)' 같은 이 행동에 대한 언급은 책을 읽은지 꽤 지났지만 지금도 불현듯 떠오른다. 맞다. 탁월한 방법이다. 이는 '명상'의 한 종류와도 닮아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만났거나 화가 나는 일을 만났을 때, 단전 밑에서 부터 끓어 오르는 화를 참는 것은 어렵다. 이 것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자신의 감정을 '깨닫거나 호흡에 집중'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으나, 가장 즉각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주변을 세는 것이다. '체벌'이 금지되 가는 상황에서 '12가지 인생의 법칙'의 저자 '조던 피터스'은 말했다. '때려라'. 그는 아이를 때리지 말라는 사회적 인식 변화가 되려 아이를 망쳤다고 말했다. 그의 책 챕터 5에는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면, 체벌을 망설이거나 피하지 말라'고 설명했다. 다소 비난 받을 수 있겠지만 '체벌'은 분명 즉각적이고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다. 어떤 일에 집중을 하다가 불현듯 딴생각을 하고 있으면 우리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그래도 되지 않으면 손바닥의 가장 두툼한 곳으로 두개골을 때린다. 스스로 몰입된 잘못된 방향을 타개할 때 조차 사용하는 이 방식은 분명 은은하고 자혜롭지 않지만 즉각적이고 확실하다. 매몰되 있는 상황에서 빠져 나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바로 주변을 세어 버리는 것이다. 

"어떻게 그걸 기다리고 계세요?"

누군가가 말했다. 물음에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않는 아이를 대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아이는 꽤 늦게 대답을 했고 그것을 기다리는데 굉장히 오래 걸렸던 모양이다. 그 동안 그 아이의 눈을 쳐다보고 기다리기에는 마음 속에서 수만가지 생각과 감정이 회오리 쳤다.

"뭐해? 대답안해?" 가 목구멍으로 치솟아 올라오는 것을 막아내는 것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바닷물을 손바닥으로 막아보는 것만큼 무기력했다. 마침 아이의 뒤로 꽂혀 있는 책장이 보였다.

 눈동자를 가장 왼쪽으로 돌린다. '한권.. 두권.. 세권.. 네권..' 대략 30권의 책을 셌을 때, 아이가 대답했다. 이 모습이 주변에서는 참 신기했던 모양이다. 아이에게는 '참을성 있는 어른'으로 보여지고, 주변인이게는 '대단한 기다림'이라고 느껴지겠지만 나는 '질문'이라는 미끼를 끼워 둔 채, 낚시 바늘을 강물에 담궈 두고 스마트폰에 몰입한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다. 낚시대가 꿈틀 꿈틀 '입질'이 오면 그때서야 낚시대에 집중하면 그만이다.

 주변을 세는 것은 몹시 탁월한 자기관리 방법이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가 '분명 뱉고나면 후회할 말을 할 것 같은 상황'을 맞이한다. 그 눈은 갈길을 잃은 송아지마냥 주변을 헤매다가 벽에 붙어 있는 '타일'의 갯수나 '보도블럭'을 세버린다.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세다보면 블랙홀 처럼 빨려 들어가던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어떤 날인가는 이럴 때가 있다. '하나, 둘, 셋, 넷... 잠깐만, 근데 이거 숫자를 세는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이렇게 숫자를 세는 것의 의미를 찾고 나면 '숫자를 세서 얻는 거도 없는데 뭐하러 세야 하나'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상황에 몰입할 때 쯤, 다시 이런 생각이 든다. '화를 내는 건 또 무슨 의미가 있지' 숫자를 세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만 최소한 상황을 악화시키진 않는다. 다만 화를 내거나 재촉하는 것 등의 일 역시나 아무 의미가 없을 뿐더러 상황을 악화시키기 까지한다. 어차피 의미가 없는 행동을 할 것이라면 더 나아지지 않더라도 악화시킬 필요는 없다. 사람들과 대화하다보면 쿵짝이 잘 맞는 사람도 있지만 얄미운 사람도 있다. 말귀를 못알아 듣는 사람이나 답답한 사람도 있고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을 모두 상대할 필요는 없으나, 상대해야 한다면 '하킴 올루세이'의 말처럼 그냥 주변을 세면 된다. 이 방식은 꽤 효과적인데 사람과의 갈등은 대게 말에서 시작한다. 잔소리가 많은 사람의 옆에서 이야기를 듣는 것은 고역이다. 다만 이 고역이라는 것 또한 어떠한 물리적인 접촉없이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성대가 떨어서 만들어낸 울림에 혀와 입술로 바람의 모양을 결정해서 달팽이관을 떨어내는 것이 어째서 피곤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따져보자면, 사실상 우리가 고통 받는 것은 '소리'보다 '의미'를 전달 받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그저 상대의 눈을 깊게 쳐다보고 속눈썹의 갯수를 세는 편이 훨씬 낫다. 속으로는 '나랏님'도 욕할 수 있다는데, 속으로 숫자를 세던, 욕을 하던, 오만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건 그건 나만의 자유이고 상대가 보이게는 적절하게 이야기를 경청하게 들린다.

 대부분의 우리는 상대를 변화할 방법도 없고 변화시킬 수도 없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는 말로써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갈등을 만들어내지만 매년 초에 스스로에게 다짐한 다짐 조차 지키지 못한다. 자신이 하겠다고 작정한 일조차 지키는 것이 어려운데 상대가 요구한 일을 한다는 것은 터무늬없다. 상대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빨리 깨닫고, 상대로 부터 변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빨리 깨닫자. 그저 상대의 말에 적당한 퍼포먼스를 해주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다. 아이에게 신발을 신으라고 한다면 함흥차사다. 오른쪽 발을 왼족 신발에 넣었다가 빼고 짝이 다른 신발을 양쪽에 신었다가 벗고 갑자기 '통통배' 놀이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부글 거리는 속을 외면한 체, 그냥 가방에서 책을 꺼내다가 바닥을 깔고 앉아 읽어버린다. 그때부터 상황이 전도되는데 책의 내용에 몰입되면 아이들이 신발을 너무 빨리 신어 버려 아쉽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예전 동생이 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어떤 청각장애 부모에 대한 이야기인데, 청각부모의 자녀가 굉장히 훌륭하게 컸다는 이야기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으나 어쨌건 청각 장애 부모는 아이가 말하는 것을 알아채고자 아이가 말할 때마다 눈을 맞추거나 입모양을 뚫어져라 쳐다봤을 것이다. 또한 아이가 칭얼대는 짜증에 동요되지 않아 평온한 마음으로 아이를 대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유야 어찌됐건 표면적으로 그렇다는 것은 몹시 중요하다. 단명한 예술가들은 생전의 영향력에 비해 더 높은 평가를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유는 '여백의 미'다. 즉, 더이상 알 수 없는 상태가 됐을때, 인간은 그것을 '신격화'한다. 날씨는 원래 '신의 영역'이었으나 인간이 많이 알게 될수록 그저 '자연현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즉 인간은 잘 모를 수록 '신격화'한다. 우리가 차분하게 상대와 상황을 진정시키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겉으로는 꽤 완전한 상태가 된다. 스스로 스트레스에 자유롭고 남의 눈에 대인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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