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10년 전 쯤, 해외에서 유명한 영상 하나가 돌아다녔다. 아기 코끼리 한마리와 배고픈 사자 14마리가 싸우는 영상이다. 이 싸움에서 아기 코끼리는 사자가 덤벼도 아랑콧하지 않고 느긋하게 자신의 길을 간다. 백수의 왕이라고 불리는 사자 14마리가 아기 코끼리와 싸우는 이 장면은 많은 사람이 시청했다. 영상만 보더라도 누가 '백수의 왕'이 될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영상에서 코끼리는 사자 14마리를 파리 쫓듯 쫓는다. 화가 난 코끼리가 반격하자 사자들은 코끼리를 피해 도망가기도 한다. 장애란 신체적 기능이나 구조에 문제가 있어서 활동에 제약이 있는 것을 말한다. 국어사전에는 '충분한 기능을 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적혀 있다. 코끼리는 위협적인 몸을 갖고 있지만 온순하게 풀을 뜯는다. 결국 우리가 '백수의 왕'이라고 하면 '사자'가 떠오르는 이유가 그렇다. 숨기고 있는 능력이 더 뛰어나고 뛰어나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사용하는지, 사용하지 않는지가 '백수의 왕'을 만든다. 사자는 코끼리에 비해 몸집이 작다. 골격은 말할 것도 없고 몸무게나 힘에서도 떨어진다. 간혹 물소나 하마, 기린에게도 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자가 '백수의 왕'인 이유는 사자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코끼리, 기린은 더 위협적인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적극적으로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아무리 신체능력이 뛰어난 축구 선수라고 하더라도 경기장에서 뛰지 않는다면 능력있는 선수가 아니다. 능력은 발휘될때만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은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활용하지 않는다. 자신에게는 언제든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위안을 삼으며 평생 그것을 이용하지 않는다. 책을 읽고도 실천하지 않고 건강한 신체를 갖고 있으면서도 누리지 않는다. 장애는 바로 그것을 말한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아이와 함께 세계를 여행을 하는 이야기는 낭만적이다. 그러나 그녀는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를 타는 장애를 갖고 있다. 1994년 고등학교 등굣길에서 갑작스럽게 떨어진 간판에 등을 맞고 척추신경이 끊어지는 사고를 겪었다. 사고 직후와 이후의 삶과 생각에 대해 얼핏 보자면 책을 읽으면서 숙연해질 정도다. 저자는 '나도 하는데, 할 수 있습니다!'라고 독자를 격려한다. '해야 하는데...'하고 하지 못하는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도 결국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것이 장애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어떤 결함에 의해 활동에 제약이 있다면 '장애'라고 했다. 휠체어를 타고도 누군가는 행하고, 누군가는 행하지 못한다. 얼마 전, 조선시대 장애인에 관한 책을 읽었다. 책을 보자면 장애인들은 그 시대에 자신의 역할을 100번이상 충족하며 사회 주요 관직과 위치를 담당하고 있었다. 피겨스케이팅에서 키가 크면 중심축이 기울어지기 때문에 불리하다. 김연아 선수의 키는 큰 편이기에 다른 선수들에 비해 불리했다. 그러나 최고의 피겨스케이팅 선수라는 것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발바닥 안쪽 아치가 비정상적으로 낮아지면 그것을 '평발'이라고 부른다. 평발을 가지면 지구력이 떨어진다. 이처럼 지구력이 떨어져서 오래 경기에 뛰지 못해야 할 선수가 '2개의 심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박지성 선수'다. 벽에 부딪쳐서 넘지 못하면 그 순간부터 그것은 장애가 된다. 다만 그것을 넘어선다면 그것은 디딤돌이 된다. 박지성 선수가 평발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박지성 선수는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가 평발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그의 축구에 대한 열정과 노력에 더 박수를 보냈다. 장애가 디딤돌이 돌이 된 것이다. 아무리 그것을 극복하면 멋진 이야기가 된다고 하더라도 신체적 장애를 갖고 있다는 것은 결코 녹록지 않다. 신체의 장애를 넘어서기 위해 정신적으로는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을까. '에드거 앨런 포'는 시련이 없다는 것은 복 받은 적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시련을 사람을 성장시키기도 한다. 그럼에도 역시나 그녀가 가져야 했던 시간을 보면 다시 또 숙연해진다.
동감(sympathy)과 공감(empathy)의 차이를 아는가. 이 둘은 모두 pathy(통한다)라는 어원을 공유한다. 연결되어 통한다는 의미를 가진단어다. 둘은 비슷하지만 분명 다르다. similar(비슷한)과 같은 어원을 갖고 있는 동감(sympathy)은 말 그대로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Entire(전체의)와 같은 어원을 가진 공감(Empathy)는 타인의 감정을 내부로 옮겨 같은 심리과정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둘은 얼핏 닮았지만 다르다. 같은 어원을 공유한다고 해서 성질이 같은 것은 아니다. 비슷하게 유추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그것의 상태를 받아드리는 것이 공감이다. 우리가 텔레파시(telepathy)처럼 먼거리에서 통하는 초능력과 같은 능력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겪거나 보는 일 외에 동감하지 못한다. 고통스러워하는 친구에게 하는 대부분의 위로는 '네 맘 다 안다'지만 친구와 헤어지면 사람들은 다시 자신의 현실로 돌아와서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자신의 일상을 지낸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략적으로 유추한 적은 많다. 다만 실제로 생생하게 이야기를 읽은 적은 많지 않다. 그녀의 이야기를 읽으며 많은 부분에서 공감되고 위로 받을 수 있었다. 누구나 자신만의 크기의 시련을 갖고 있다. '장애'라고 말할 수도 있는 시련이다. 누군가는 배우자를 잃기도 하고 누군가는 부모를 잃기도 하며 누군가는 남들보다 허약한 체질로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모두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시련을 갖고 있지만 완벽해 보이는 상대들을 보며 자신의 가치를 깎아버리곤 한다. 다시 생각해보면 시련은 극복하지 못했을 때, 시련으로 남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난 뒤부터는 축복일 수 있다. 그것을 극복할지, 말지는 어떤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만히 자신을 돌이켜 생각해보고 마음을 어떻게 먹는지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