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그러진 캔맥주가 방에 여기 저기에 굴러다닌다.
업무를 마치고 나면 언제나처럼 편의점에서
만 원짜리 캔맥주 4개와 마른 오징어를 구매하고 돌아온다.
처음에는 그냥 '휴식'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패턴이 됐다.
동호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양말을 구석에 던져 놓는다.
캔맥주를 하나 깐다.
발가락으로 컴퓨터 전원 버튼을 키고
컴퓨터 의자에 드러눕듯 앉는다.
"아~ 지긋 지긋해."
동호는 한숨 같은 신음을 내쉬며 한탄한다.
"이 놈의 회사.. 언제까지 다녀야하나."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고 싶은 욕구는
사원에서 대리로 진급하면서 사그라 들었다.
언젠가는 큰 꿈을 갖고 입사를 했지만
지금은 그냥 무탈히 하루를 보내는 것이 최우선이다.
집으로 돌아오면 복사, 붙이기 한 듯
같은 동작을 하고 같은 감정을 느낀다.
아마 컴퓨터 화면을 밤 늦게까지 들여다 보다가
맥주가 끝나는 시점에 침실로 가서 스마트폰을 한참 더 볼 것이다.
그것이 동호의 하루다.
매너리즘일 수도 있지만
의미없는 포털사이트 대문을 새로고침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띠딩'
갑작스럽게 도착한 메일 거기에는 '동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대본] 9/18일 대본 변경 안내_동호 役'
'동호 役?'
동호는 수 없이 쌓인 스팸 메일 중에서
유독 이 메일만큼은 눌러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클릭!'
***
제목: [대본] 9/18일 대본 변경 안내_동호 役
내용:
안녕하세요.
'장자의 꿈' 기획작가 '은평' 입니다.
급하게 변경 사항이 있어 메일 안내 드립니다.
지금 출연 중이신 '동호 役'에 약간의 수정사항이 있습니다.
급하게 '동호 役' 인물 출연을 종료하고자 하오니,
대본 숙지 부탁드립니다.
원래 대본 전달은 대면이 원칙이지만
워낙 급한 수정 건이라 메일로 드립니다.
첨부파일에 대본이 있구요.
대본 내려 받으시면 메일은 삭제할께요.
대본도 숙지하시고 폐기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Ps. 출연료 정산은 '강동구 CP님'께서 출연 종료일에 주신데요.
***
"뭐지?"
동호는 메일 상단에 있는 첨부파일을 클릭했다.
'동호 役 마지막 씬'
대본을 훑는다.
대본에는 오늘의 날짜로 시작했다.
심지어 시간도 두 어 시간 전이다.
***
'동호 役' 대본
...
(업무를 마치고 편의점에서 만 원짜리 캔맥주 4개와 마른 오징어를 구매하는 동호)
집에 도착하면 양말을 구석에 던져 놓고 캔맥주를 깐다.
발가락으로 컴퓨터 전원 버튼을 키고 컴퓨터 의자에 드러눕는다.
동호: (한숨 같은 신음을 내쉬며) 아~ 지긋 지긋해."
동호는 다시 말한다
동호: 이놈의 회사 언제까지 다녀야 하나.
...
***
거기에는 방금 전까지 자기가 했던 말들이 적혀 있었다.
'뭐지?'
메일에 따르면 내일이 마지막 씬이라고 했는데...
'내가 죽으면 출연료가 정산된다?'
동호는 알 수 없는 혼란으로 메일을 다시 들어가 본다.
그러나 메일은 이미 사라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