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의 80%가 바다에 산다. 인류가 알고 있는 건 고작해봐야 1%다. 인간을 일컬어 '만물의 영장'이라로 스스로 자칭하면서 사실 인간은 비교적 가장 최근에 출현했으며 바다를 포함한 지구에서 한정적인 공간에 모여살 뿐이다. 2000년 전, 로마 남부지역에는 꽤 번영한 도시가 하나 있었다. 이곳은 귀족과 상인들의 휴양지며 농업과 상업이 발달한 번영도시였다. 이 도시와 시민들이 사라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단 하루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폼베이는 대자연의 위대함에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게 한다. 인간은 물을 마시지 않으면 3일 안에 죽는다. 중국 왕조 중 다섯 곳은 기근으로 멸망했다. 세계 2위 경제 대국이라는 현 중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UN이 설정한 1인당 물 이용양의 5분의 1도 안 되는 정도로 물 기근이 심하다.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미국 셰일보다 더 많은 매장량을 가지고 있으면서 '물부족' 때문에 중국은 에너지 기근도 심각하다. 인간이 착각하는 것은 우리가 자연 위에 군림한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를 길게 잡아도 500만 년이다. 500만 년의 인류 역사에서 인간이 자연보다 우위에 있던 적은 단연코 한 차례도 없다.
아이에게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다. 제주에 살면서 분명 바다는 지겹게 보고 있다. 바다를 보여준다는 것은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꼬리'를 보여준다는 것이 아니다. 바다의 피부만 관찰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 싶은 곳에서는 생명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가물던 여름 수도로 정원에 물을 준 적 있다. 1분만 내리면 금새 촉촉해질 정원 표면은 수 시간 물을 뿌려도 가물긴 마찬가지다. 표면을 적신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물을 하늘에서 내려야 하는지 떠올리자면 그냥 떠 있는 수중기 구름이 사실은 물탱크로 보이기도 한다. 자연은 어떤 원리를 통해 바닷물을 증류하여 육지에 뿌린다. 그것이 얼만큼 증류되고 얼만큼 뿌려대는지는 땅 위에 생물 종류를 결정 지었다. 지질학자인 '다윈'이 '생물의 진화론'을 이야기한 것은 생물이전에 '지질'과 '해양'이 더 근본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적게 물을 뿌리면 작은 풀이 지란다. 많이 물을 뿌리면 긴 풀이 자란다. 물이 얼마나 뿌려지는지는 '밀림'과 '초원'을 결정했다. 밀림과 초원은 그 지역 초식동물의 진화에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다시 육식 동물에 영향을 끼쳤다. 그렇게 영향은 끼쳐지고 끼치고를 반복하다가 최종적으로 인간에게 끼쳐진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먹이사슬의 꼭대기라고 누군가 그랬다. 그렇다고 하기에, 인간은 그 영향력의 제일 마지막에 위치한다.
승선선을 구매했다.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흠짓했다. 13만원 정도 지출했다. 예상 시간은 한 시간 안쪽이다. 계발에 관한 돈은 아끼는 것이 아니다. 왜인고 하니, 그것은 최소한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내는 완전한 투자이기 때문이다. 아이와 승선하고 대기실에서 잠시 대기했다. 뉴질랜드에서 10년을 생활하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은 여행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곳에서 여행다운 여행은 출국을 결정한 마지막 한 주가 전부다. 그시기 착찹한 마음을 가지고 '퀸스타운'을 방문했다. 거기서 봤던 풍경과 먹거리는 지금도 눈 앞에 선하다. 당시에도 유튜브나 블로그는 있었지만 어째서 그것을 시작하지 않았는지 후회된다. 아이와의 기억은 될 수 있으면 이처럼 영상과 사진으로 남기려고 한다. 지금 방문한 이곳의 사진도 영상으로 촬영해 두었다. 곧 편집하여 유튜브로 업로드 할 예정이다.
여행은 먼곳을 방문해야 할 필요는 없다. 가장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는게 좋다. 그것은 오랜 해외생활 동안 느꼈다. 가장 가까운 곳이 언젠가는 가장 먼 곳이 되기도 한다. 뉴질랜드에서 매일 보는 풍경을 즐기지 않았다. 어차피 자고 일어나면 다음 날도 그곳에 있을 것이고 언제든 그곳을 여행할 시간은 충분할 것이라고 여겼다. 지금 돌이켜보건데, 뉴질랜드는 엄청나게 먼 곳이었다. 뉴질랜드에 있을 때는 제주를 여행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돌아와보니, 뉴질랜드를 여행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그때는 여기가 가장 멀었고 지금은 거기가 가장 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미래와 과거 같다. 시간과 공간은 얼핏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와 같다. 흔히 '시공간'이라는 표현을 하는 이유도 그렇다. 지금을 놓치면 미래의 나는 지금을 후회할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의 나는 미래의 나를 동경할지 모른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여기나 저기나, '있을 때 잘하자.'
잠수함을 타기 위해선 배를 타고 어느정도를 이동한다. 아이들은 나이에 비해서 여러번 배를 탔다. 마라도와 가파도를 방문한 기억도 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와 배를 타고 여행도 갔다왔다. 나에게는 아직도 신기한 배다. 다만 하율이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창가에 앉은 나에 반하여 하율이는 복도쪽 자리를 선택했다.
저 작은 눈과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율이는 가만히 출렁거리는 파도를 바라봤다. 어린 아이답지 않게 한참을 말없이 창가를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몹시 궁금하여 여행이 끝난 뒤, 다율이에게 물었다. 다율이는 답했다.
"별거 아니야, 아빠."
지금도 한참을 창밖을 바라보던 다율이의 뒷모습이 그려진다. 어쩐지 나이에 맞지 않는 깊은 생각을 했으리라고 짐작한다.
도착했다. 잠수함에서 내리는 이들은 우리가 타고 온 배로 승선했다. 우리는 내려서 잠수함에 탑승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같은 공간을 다른 시간을 두고 머물렀던 이들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어떤 힘이 이들을 이 공간으로 불러 들었을까. 엿듣고자 한 건 아니지만, 가족의 형태는 참 다양했다. 두 아들과 함께 온 젊은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애띈 얼굴이지만 엄마의 키를 훨씬 넘긴 녀석들이 엄마의 손을 잡고 잠수함을 타러왔다. 그 모습이 한참을 안쓰러웠다. 어째서 남편과 함께 오지 않았을까. 생각보다 이런 경우는 흔했다. 어떤 이들은 부모님과 함께 왔고, 누군가는 장모님과 사위가 오기도 했다. 가만히 있으면 들려오는 정보들은 세상에 가족 형태가 참 많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미국 시트콤 중에는 '모던패밀리'가 있다. 이 드라마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보여준다. 동성 커플이 있는가하면 나이 많은 남편과 젊은 아내, 영어가 서툰 외국인과의 부부생활. 사실 그냥 웃고 넘기기에 그것들은 생각보다 흔한 가족 형태다.
탑승 전에 아이와 사진을 찍었다. 꽤 잘 찍고 싶었으나 바람에 날리는 머리, 보채는 아이 사이에 정신없이 찍었다. 마치 교도소를 들어가는 죄수처럼 '어벙'한 표정으로 찍고 보니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율이는 마스크를 벗지 않고 사진을 찍게 됐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꽤 오랫동안 이 이야기를 했다.
뉴질랜드와 한국은 시차는 크지 않다. 3시간 정도다. 시간은 그렇지만 계절은 정반대다. 그러고보면 사실 6개월 3시간이 차이가 난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바닷속의 시간도 상대적으로 느리다. 물과 땅은 비열의 차로 인해 계절이 하나씩 다르게 나타난다. 물은 데워지느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리고 식는데 것도 그렇다. 잠수함을 타고 내려가는 행위만으로 계절이 달라졌으니, 어쩌면 타임머신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바닷속에는 산호가 보였다. 산호는 '식물'처럼 보이지만 식물은 아니다. 동물이다. 생각해보면 식물이냐, 동물이냐는 인간의 분류법에 의해 존재할 뿐, 산호는 애초에 '산호'였을 뿐 식물인 척 했던 적이 없다. 그렇다. 모든 것은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그것이 오롯하게 그것이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세상에는 굳이 오해할만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해라는 것은 바라보는 사람이 만들어낸 견해가 실재와 다를 때 일어난다. 어린 시절, 해녀들이 착용하고 내려가는 '수경(물안경)을 수영시간에 착용하고 갔던 적이 있다. 밥풀을 딱풀 대신하여 붙이던 '촌'의 기억에 친구들은 내 수경을 놀렸다. 눈만 말끔하게 가려주는 물안경에 비해 내 수경은 커다랗고 코까지 통채로 가렸다. 그것은 다른 친구의 물안경보다 비쌌고 좋았다. 그래도 그 수경이 창피했다. 지금와보면 재밌는 일화다.
수경을 통해서 바라를 바라보면 시야가 확실하게 넓어진다. 시야가 넓어지니 바다에 떠다니는 먼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색깔을 알 수 없고 크기도 알기 힘든 미세한 덩어리가 물속에서 떠다닐 때, 나는 제주도 바다가 '더럽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알고 지내던 시간은 30년이 넘었다. 잠수함이 아래로 내려가며 안내원은 말했다.
"물에 떠다니는 부유물들은 '먼지'가 아니라 '플랑크톤'입니다."
그렇다. 그것이 먼지로 알고 지냈던 30년의 세월을 아이는 줄였다. 아이는 플랑크톤이 먼지 알지 못했다. 저 미세한 것이 커다란 고래의 주식이라고 보니, 황당할 만큼 더 작게 느껴진다. 세상에는 아이러니한 것이 참 많다. 고래 정도면, 최소 고등어 정도는 먹어도 시원찮을 것 같은데, 꼭! 더 대비되는 플랑트톤을 먹는다니 말이다.
바닷속에서 '놀래기'를 봤다. 제주에 살면서 '놀래기'라는 이름은 꽤 많이 듣는다. 대다수 어버지들의 취미가 '낚시'이기도 한 지리적 특징 때문이다. 어쩐지 익숙한 이 물고기는 특이한 점이 있다. 바로 '성전환'이다. 대부분의 놀래기는 암컷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은 암컷으로 생을 마감한다. 다만 일부가 숫컷으로 성전환을 하면서 번식을 하는 특이한 종이다. 근래 알게 된 충격적이고 신기한 동물의 이야기 중 가장 으뜸이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분류도 사실을 따지고 보자면 '인간의 분류' 영역이 아니던가. 암컷과 숫컷이라는 분류가 우리가 문화적으로 인지하는 '남성'과 '여성'과는 조금 다를 것이다. 여성은 어때야하고, 남성은 어때야 한다고 분류한다면 '놀래기'의 변신은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까.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서 남성의 갈비뼈로 여성을 만들었다고 했던가. 놀래기를 보자니, 여성이 먼저라는 것은 놀래기만 예외일까하는 의구심도 든다.
아이와 시간이 지나간다. 지금도 지나간다. 아이를 키우는 순간은 아마 중2부터 멈춰질 것이다. 중2부터는 '양육'이 아니라 '공생'이다. 아이는 스스로 자신의 인간관계를 형성할 것이다. 자신의 세계가 확실해지고 나면 부모의 관심은 '간섭'으로 변한다. 그 갈등을 3년 정도 겪고 부모는 20세에 아이를 완전히 독립시켜야 한다. 그것은 자연이 말하는 이치보다 조금 느린 숫자다. 그러나 그래야 한다. 종이 비행기는 계속쥐고 있으면 멀리날지 못한다. 적절한 순간에 손을 떼주어야 비행기는 자유롭고 멀리 날아 갈 수 있다. 온전한 순간에 손을 떼주기 위해, 어린 시기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추진력을 보조해 주어야 한다. 그게 내가 할 몫이다. 그 뒤로 아이는 아이의 삶을, 나는 나의 삶을 살면서, 비슷한 추억을 공유하는 '이미 과거가 된 철 지난 동거인'으로 남아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