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독특한 소재, 판타지 공포_교도소 괴담

by 오인환


동경의 대상이라고 하긴 그렇다. 호기심의 대상이라고 할 법하다. 경험한 적은 없지만 그래서 호기심의 장소다. '교도소' 이야기다. 교도소를 '징벌'의 장소로 볼 수는 없다. '격리'의 장소로 보기도 힘들다. '악의 장소'로 보기는 더 힘들다. 생각보다 교도소 수감자는 많다. 대한민국에서 교도소 수감자는 대략 5만 명 쯤 된다.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 국민 1,000명 중 한 명은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미국은 그 숫자가 훨씬 더 많다. 미국 수감자는 220만명으로 미국인 136명 중 1명이 수감자다. 언젠가 아는 지인이 말했다. '범죄자'들은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한다고 말이다. '범법자'를 모두 격리 한다면 사회는 기능을 멈출 것이다. 매스컴이 말하는 바와 같이 '교도소'는 악의 소굴이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이들도 오해나 실수로 수용 생활을 한다. 정신적인 질병이 있는 이들도 있다. 20세기 초, 일본 제국주의에 병합된 시기, 수감자 중에는 '독립운동가'들이 더러 있었다. 이들의 죄명은 '가택침입, 강금, 강도, 살인, 건조물손괴, 건조물침입, 경찰, 교사, 구금자탈취, 기물손쉐, 공무방해, 공갈 등이다. 당시 기준의 적법한 절차를 거쳤을 것이다. 민주화 운동도 비슷하다. 이들도 살인미수, 국가보안법 위반, 폭행 등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사법부는 선과 악을 판단하지 않는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정의'는 '선과 악'을 담을 수 없다. 사법은 법치에 따른 정의로만 판단한다. 개인적으로 민감한 문제이지만 '사형제도를 찬성'하지 않는다. 국가 권력이 국민주권자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극악무도한 살인범이나 파렴치한은 분명 매스컴에 있다. 그 소수를 처벌하기 위해, 국가가 '주권자'의 생명을 침해해도 되는 법안을 만드는 게 개인적으로 합당한지 의구심이 든다. 6.25 전쟁 당시 '최창식 대령'은 한강교 폭파 누명을 쓰고 사형됐다. 총살 후 14년 뒤에 그의 유족은 재심을 청구했다. 재심의 결과는 무죄다. 국가 시스템이 투명한 경우, 공권력의 힘은 중요하다. 다만 검, 경찰이 실적을 위해 무고한 시민을 흉악범으로 몰아 처형해 버리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법을 아는 이들이 법을 들어매고 권력을 행사할 때, 무고한 희생에는 어떤 보상도 소용없게 된다.



개인적으로 교도소에 관한 영상과 드라마를 재밌게 봤다. 분명 다르겠지만 군부대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한 쪽은 명예로운 '국방 수호'를 명분에 하고, 다른 쪽은 죄에 대한 '교화'를 명분에 한다. 다만 둘다 공통점이 있다. 자유를 반납했다는 점이다. 전역을 기다리느라 네 줄 짜리 '오바로크'를 치고 전투모를 꺾어 썼을 때, 한 줄 짜리 이등병보다 더 빨리 집으로 가고 싶었다. '운전병'이던 내가 시내를 돌아다니는 또래를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전역을 하면 언제든 자유롭게 야식을 먹고 밤늦게 영화도 볼 것이라고 다짐했다. 평소해보지 못할 일들을 매일 같이 도전하기를 머리로 상상했다. 별거 아니지만, '자유'만 준다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의욕이 '부글 부글' 끓어 올랐다. 다시 말하자면, 자유로운 상태가 됐을 때는 그 당연한 것에 감사함이 없다. 부대에서는 밤 11시 취침 소등 이후 라면을 끓어 먹는 일도 부대에 보고 해야 한다. 지금은 언제든 내멋대로 해도 괜찮다. 그당시 간절하던 그것들을 이미 차고 넘칠만큼 가지고 있으면서, 감사함을 모른다. 이 사실을 조금 더 어린 그때의 내가 알아차린다면 틀림없이 호통쳤을 것이다. 자유를 갈망하던 그 시기에 대한 향수가 '교도소'와 '군대' 이야기를 재밌게 했다.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하는 순간, 다른 하나의 옵션을 죽을 때까지 경험해보지 못한다. 내가 버린 것에 대한 기대치를 얼마나 갖고 있느냐에 따라, '후회'의 강도는 커진다. 결국, 자유로워진 사람에게는 '억압'이 그립고, '억압'된 사람에게는 '자유'가 그립다. 다만 현재를 완벽하게 만족하나면 다른 하나에 대한 기대치는 절대적으로 낮아진다. 현대를 만족하지 않는다면, 선택하지 않은 옵션에 대한 상상을 자주한다. 그것을 흔히 말하면 '망상'이라고 한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특정한 망성을 가지는 병적 상태를 '정신병리학'에서 '편집증, 망상 장애'이라고 부른다. 누구나 적절한 정신병을 갖고 있다는 말에 일부 공감한다.



교도소에 관한 이야기는 강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서점에서 그 책을 집었다가 다시 제자리에 두고 왔을 때, '후회'라는 감정은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떠올랐다. 그것을 가지고 와야 했다고 확신했다. 가지고 오지 않았음을 후회하던 '편집증세'를 멈추기 위해 다음 날 잽싸게, 책을 들고 나왔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책은 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책이 잘못됐다기 보다, 기대와는 전혀 다른 성향의 책이었다. 교도소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폐쇠적이고 음산한 분위기와 함께 다양한 '범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 책은 다소 분류하자면 판타지류에 맞아 보인다. 괴물이나 유령이 나오는 소설이며 역시 범죄자들을 징벌하며 권선징악을 알려주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부하는 문학을 좋아하진 않는다. 문학 뿐만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주인공과 악역이 명확하게 구분된 영화는 좋아하지 않는다. 악역이 악한 일을 하는데 충분한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네이버 평점 9.0이 넘는 영화 중 '봉오동 전투'라는 영화가 있다. 본 영화에서 일본인들은 사람을 살상하며 사악하게 웃는다. 그들은 감정이 없고 살상화 괴롭히는 일을 즐기는 '사이코패스'로 보인다. 이런 류의 이야기는 빠르고 즉각적으로 흥미를 이끌어 올 수는 있지만 여운이 오래 남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군인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들이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졌을 것이라 믿지 않는다. 그들도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이며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을 것이다. 미국 드라마 '프리즌브레이크'를 보자면 '시스도어 백웰'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는 드라마에서 아주 사악한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인물 하나 하나의 내면으로 들어가 보는 미국 드라마의 특징에 따라, 점차 그의 악행에 설득 당해간다. 개인적으로 내 또래보다 청소년기의 아이들이 읽는다면 한편의 공포 판타지물을 보는 것처럼 느끼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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