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명해지지도 부자가 되지도 못했다. 다만 세월을 받아들이고 부는 바람에 순응하는 법을 조금 깨쳐 오늘 친구인 풀과 내일 안길 땅과 이야기하며 아무 마음도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 -김성태 작가 글 中
한때, 메모광으로 살았다. 지금도 남들보다 비정상적으로 많은 걸 기록하며 살지만, 과거에 비하면 많은 부분을 내려 놓았다. 군대 간 아들과, 군대에 아들을 보낸 아버지의 편지를 보며 많은 걸 느낀다. 편지에 날짜 뿐만 아니라 분까지 기록되어 있는 편지들... 2012년, 벌써 10년도 넘은 편지들이 10년 뒤 나에게 왔다. 같은 시기, 나의 일기장에는 해외 취업에 대한 설레임이 적혀 있었다. 메모에 대한 강박을 되돌이켜보니, 나의 기록에도 분이 적혀 있었다. 뉴질랜드에서 비자 연장을 고민하던 나와 비슷한 시기 전역을 기다리는 누군가가 같은 시간을 살았다는 증거는 서로의 기록에 남았다. 같은 시간을 살면서 나는 시간을 연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반대쪽에서는 시간이 빠르게 가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삶이라는 게 상황마다 상대적이란 걸 깨닫는다. 김성태 작가의 글 중 가장 마음에 와닿는 부분이 있다. 아들과의 편지를 쓰며 본인 일기도 기록한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아무 마음도 없는 것 처럼 살고 있다'는 대목이다. 특별하게 어떤 방향으로 지독하게 갈망한 것은 아니었는데 살다보니, 나는 여기에 있다. 인연이라는 게, 참 희안한 것이 현재 내가 만는 사람과, 읽는 책, 보는 환경들 모두가 결코 인연따라 흘렀을 때, 도출 될 수 없는 결과들이다. 해외에서 나는 아주 안정적으로 일을 하고 있었으며, 소득이나 생활의 질 면에서도 그닥 나쁘지 않았다. 특별하게 한국에 귀국할 이유가 없던 내가 어쩌다 보니 여기에 있다. 운명을 거스른 희열을 느끼며 이들의 책을 특별한 감정으로 읽는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오묘하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남자들 사이에서는 점차 할말이 줄어드는 것이 보통이다. 군입대 하는 날, 어머니는 제주 공항까지만 마중하셨다. 지금은 사라진 306 보충대로 향하는 날,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 길을 함께 해 주셨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부대 앞에서 부대찌개를 먹었던 기억은 있다. 그 다음의 과정은 기억에 없다. 바로 보충대 대기석에 앉아 있는 모습이 내 다음 기억이다. 아무 말 없이 아버지와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마이크에서 안내가 나왔다.
"장병 여러분들은 잠시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어리버리한 표정을 하며 '잠시'라는 키워드에 꽂혔다. 아버지께 금방 갔다오겠다고 말씀드리고 연병장으로 나갔다. 잠시 무언가 확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께 인사도 하지 않았다. 줄을 서고 연설을 듣고 나니, 앞줄부터 하나씩 건물 뒷편으로 갔다. 아버지가 기다리는 좌석을 돌아봤을 때는 늦었다. 어리버리하게 마지막을 보냈다. 입대하고 한참 다른 세상을 겪다가 첫 전화를 연결할 때,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몹시 마음이 안좋아 하셨다는 사실을 들었다. 아버지는 말이 없으셨지만 속으로 걱정이 많으셨던 것 같다. 책을 읽는 내내, 군생활과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동시에 떠오른다. 훈련소에서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다. 아버지는 편지 봉투 뒷 편에 만원짜리를 잘 숨겨 보내셨다. 분대장은 그 앞에서 직접 편지를 뜯길 원했다. 편지를 뜯자 힘이 있는 아버지의 손편지가 적혀 있었다. 1만원짜리 편지는 규칙위반이라고 하셨다. 분대장은 아버지께서 보낸 편지는 잘 챙겨두고 1만원은 될 수 있으면 꺼내지 말라고 하셨다. 그때가 생각난다. 아버지의 손편지를 받은 것은...
김성태 아버지와 김영준 아들의 이야기는 군대에서 이어진다. 요즘 군대는 스마트폰도 사용할 수 있다지만, 군대가 아니라면 '부모님과의 손편지'라는 낭만은 쉽게 기회가 오지 않는다. 손편지는 확실히 카톡이나 전화와 감성이 다르다. 분량에 마음을 녹여 내기 위해, 몇 번을 생각해야 하며, 일상적이지 않은 말투를 사용하게 된다. 주고 받는 기간의 틈이 넉넉하다. '기다림'이라는 효과는 '설레임'으로 바뀐다. 편지는 상대방에게 내 이야기를 남긴다. 단순히 '할 말'을 하는 용도가 아니라, 내 이야기를 기록하고 상대에게 넘기는 행위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에게 편지를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철저하게 남긴다. 특별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라기 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자신을 보여준다. 그 덕분에 독자는 아버지 '김성태', 아들 '김영준' 작가의 생각과 삶을 엿볼 수 있게 된다. 고려대학교에서 법학도로 공부하다 나이가 차서 군대를 입대한 아들과 우체국에서 일하며 귀농의 삶을 꿈꾸던 두 남자의 이야기는 10년 전에 진행형인 상태로 나에게 전달된다. 그들의 삶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영문법에서 '과거 완료 진행'의 개념이 이렇다고 보여진다. 대과거(더 먼 과거)에서 과거로 완료되어 진행되는 시점. 그들은 그들의 방향대로 삶을 이어갔을지 모른다. 2006년 나 또한 군입대를 했다. 강원도 철원의 청성부대로 전입했다. 그때는 나 또한 기록광이라 별의 별 기록이 다 있다. 심지어 시간에 대한 강박은 일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의 '초단위'도 적혀 있다. 그날의 감정은 '상,중,하'로 기록되어 있지만 나중에는 상상, 상중, 상하, 중상, 중중, 중하.. 등으로 쪼개져 기록했다. 부모님께 해드리고 싶은 말, 나가면 먹고 싶은 음식. 그곳에서 깨달은 인간관계와 사회의 철학 등. 그 소중한 기록을 다시 들쳐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책으로 내면 수 권이 나올 것이라는 너스레를 떨곤 한다. 막상 책을 내보자면 가장 먼저 막히는 것은 분량이다. 또한 실천이다. 아들은 자신들의 편지를 책으로 내야겠다는 농담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실제 이 책이 나온다. 생각해보면 책 한 권 내는 것은 별거 아닐지 모르지만, 책을 내기 위해 수 번을 퇴고하고 글을 곱씹다보면 아들은 아버지의 생각을, 아버지는 아들의 생각을 여러 번 재독하게 된다. 그것은 그저 책을 낸다는 의미를 넘어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다시한번 김성태 작가 님의 글 중 자신을 회고하는 부분이 떠오른다. 우리 모두는 사실 대단한 목적을 갖고 산다고 해도 모두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훌륭한 사람이나 부자, 유명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을 받아드리고 현실을 인지하면서 아무 마음도 없는 것처럼, 가족을 사랑하며, 하루 하루를 사는 것이다. 인생에 특별함을 기대하면 행복은 아득하게 멀어진다.
"나는 유명해지지도 부자가 되지도 못했다. 다만 세월을 받아들이고 부는 바람에 순응하는 법을 조금 깨쳐 오늘 친구인 풀과 내일 안길 땅과 이야기하며 아무 마음도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 -김성태 작가 글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