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대표 시인 중 하나인 '미구엘 에르난데스'는 '혼자 있을 때, 나는 진정한 내가 된다'라는 말을 했다. 고독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전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관계'와 '상황'에 맞는 '자아'를 선택한다.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는 노인도 동네 친구와 함께 할 땐,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손자와 함께 할 때, 친구와 함께 할 때, 직장 동료와 함께 할 때, 사람들은 각각 상황과 관계에 맞춰 모습을 바꾼다. 흔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을 때, 그에 맞는 모습으로 변하기 마련이라는 말이다. 그 모습들은 모두 자신의 내면에 있는 '페르소나' 중 하나일지 모르지만, 관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는 자신은 '절대적인 자아'가 아니라 '상대적 자아'일 뿐이다. 코끼리는 토끼와 비교 했을 때는 엄청나게 큰 동물이지만, 흰수염 고래와 비교한다면 30분의 1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코끼리'는 큰 동물도 아니고, 작은 동물도 아니다. 무엇에 비교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큰 동물이 되기도 하고, 작은 동물이 되기도 한다. 상대적인 비교에 따른 정체성은 온전히 그것의 본질을 담고 있기 힘들다. 만리장성은 실제로 굉장히 크지만, '천왕성'과 비교하면 우스워진다. 다만 그것을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 개집와 비교하면 웅장해진다. '만리장성'은 실제로 우습지도 않고 웅장하지도 않다. 그 무엇과 비교하지 말고 온전히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비교 대상을 지워야 한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인간의 모든 고민은 대인관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비교대상이 생겨나면 '인간'은 그 관계 속에서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비교 대상에 의해 왜곡된 정체성을 갖게 된다. '자아'라는 모호함 덩어리를 정의하기 위해 인간은 필연적으로 비교대상을 찾는다. '무언가에 비해 크다. 무언가에 비해 작다. 무언가에 비해 게으르다. 무언가에 비해 똑똑하다' 등, 모호한 자아를 정의하기 위한 '무언가'를 필연적으로 찾는다. 여기서 '무언가'는 '평가자'가 임의적으로 설정한다. 이렇게 왜곡된 자아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에 노출되지만, 아주 짧게 혼자 있는 시간에 어떤 비교대상과도 비교되지 않은 '순수한 자아'의 상태에 노출될 때가 있다. 그 시간에 인간은 '불안감'을 느낀다. 비할 곳이 없어진 '자아'가 가진 불안감을 우리는 '외로움'이라고 부른다.
적막한 집에 들어온 누군가는 보지 않는 TV를 보거나, 의미없는 유튜브 채널을 시청한다. 번쩍거리고 시끌벅적한 소리는 '너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신호를 끊임없이 우리에게 보내온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인 '스탠리 밀그램'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복종심리'라는 것이 있다. 비록 그것이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비효율적이라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속적인 환경에 놓이면 그에 복종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다.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교양적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환경과 관계가 만들어낸 구조에서 '명령자'에게 복종한다. 그것은 권위자와 자신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회피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고로 인간은 '자유'를 추구하지만, '구속'과 '복종'을 탐닉하기도 한다는 의미다. 2020년에 방송한 MBC 라디오스타에서 샤이니의 '키'는 군대 생활이 가장 쉬웠다고 말했다. 그는 군대에서는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으면 된다'는 의미에서 군대가 비교적 쉬웠다는 말을 했다. 아이돌 가수로 생활하면서 가지게 되는 '자율적인 삶'이 주는 부담감을 피할 수 있다는 설명도 이었다. 이는 가수 '키' 뿐만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에게 있는 현상이다. 누구에게나 '복종심리'가 있다. 이 복종심리는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간이 다양한 시스템을 만들고 대규모 공사를 할 수 있게 했고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게 도왔다. 이처럼 누군가에게 복종하길 좋아하는 인간 본성과 다르게 인간이 혼자 놓여지게 된다면, 극심한 불안감을 느낀다. 자신을 정의해주던 기준점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자신이 의지하던 '권위'도 사라지고, 자신을 정의해주던 비교대상들도 모두 사라진다. 오로지 '자신'만 남는다. 비교할 주변대상이 모두 사라지면 기댈 대상을 찾는다. 자아가 넘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를 생각해보면 쉽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는 뒤에서 누군가가 잡아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편하게 운행할 수 있다. 누군가가 밀어주고 끌어주는 강압은 자율성을 포기하는 대신 안정감을 주게 한다. 다만, 뒷자석을 잡아주던 이가 손을 놓고 난 뒤, 자전거를 혼자 타는 일에 익숙한 이들은 누군가가 잡아주지 않더라도 더 안정적으로 운행할 수 있다.
위대한 대부분의 일들은 '혼자' 있는 시간에 일어난다. 목욕할 때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 잠을 자거나 깨어날 때,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혼자 있게 된다. 대부분의 위대한 생각들은 이처럼 혼자 있는 시간에 일어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제서야 오롯한 자아가 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반듯하게 서 있는 자아는 권위자의 통제력을 벗어나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게 한다. 흔히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반박으로 '영상 매체의 유용성'을 말한다. 다만 '영상매체와 책'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자율성'을 볼 수 있다. 자신의 이해에 맞는 속도로 읽고 쓰거나 다시 읽거나, 미리 앞으로 갔다 올 수 있는 자율성은 '영상매체'보다 '독서'에 있다. 또한 작가는 글을 쓸 때, 오롯하게 혼자의 경험을 한다. 가사가 있는 노래를 들으면서 글을 쓰거나, 친구와 잡담하면서 글을 쓰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고 해도, 글을 쓸 때만큼은 언제나 혼자이며, 그 스스로 오롯하게 서 있는 자아를 완전하게 글에 투사한다. 인간의 눈은 기본적으로 밖을 향하고 있다. 언제나 밖을 살핀다. 고로 안을 살피기는 어렵다. 밖에서의 움직임과 표정을 살피고 소리를 살핀다. 그러다보면 정작 안을 살피기 어렵다. 회사 과장의 숨소리나 친구의 목소리, 직장동료의 표정을 샅샅이 살피는 일에 주목하다보면 자신은 어떻게 숨을 쉬고 있는지, 목소리는 어떻게 내고 있는지, 자신의 표정은 어떤지를 잊어버린다. 자신보다 '남'을 더 많이 살피는 이는 '자율성'보다는 '복종'에 촛점을 맞춘다. 다른 이들에게 복종하는 일에 익숙한 삶의 패턴이 '리더'가 되긴 어렵다. 사람은 오롯하게 혼자 서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될 수 있다면 눈을 감고 마음을 살피는 명상을 하거나, 오롯하게 혼자만의 내면을 탐릭하는 '독서'를 하면 더 좋다. 왜 위대한 리더들이 '독서'와 '명상'을 강조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가만히 어린시절 나의 자전거 뒷자석을 잡아주던 이가 놓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를 살피면 된다. 혼자 있을 때, 나는 오롯하게 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