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
'저지대국가'를 부르는 이름은 'Netherlands'다. '낮은'이라는 Neder과 땅을 의미하는 land의 합성어다. Ukraine의 어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Oy는 '근접하다'라는 의미고 Krai는 '땅'을 의미한다. Ukraine을 굳이 영어로 따지고 들자면 'borderland'로 '국경 인접국' 정도로 볼 수 있다. 이 말이 고유명사가 된 이유는 다른 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 소련이 붕괴하면서 갑자기 생겨난 신흥국 쯤으로 알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에 관심이 없었다. 너무나 생소한 '우크라이나'는 '스탄'으로 끝나는 다른 구소련 연방공화국과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구와 영토가 이처럼 크다는 사실도 사람들은 몰랐다. 다만, 우크라이나는 꽤 중요한 이름이 됐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그 전쟁의 양상이 서방국들과 러시아의 대립으로 확산됐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에 대해 무지한 것이 어쩌면 세상 사는데 무책임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그렇다면 '우크라이나'는 갑자기 소련에서 떨어져 나온 신생 독립국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키예프 루스'라는 이름은 종종 들어 볼 수 있다. '키예프 루스'는 중세시대 동유럽에 존재하던 국가로, 동시대에 유럽에서 가장 영토가 넓은 국가였다. 다수의 사람들이 '루스'하면, '러시아'를 떠올리겠지만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자신들이 '정통성'을 그곳에서 찾고자 한다. 우리가 바라보는 시각은 '러시아'의 시각이 상당히 치중됐다. 앞으로 식량문제가 세계적인 이슈가 되면서 우크라이나와 같은 곡창지대가 재조명 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16세기 한 문헌에 따르면 '토양이 비옥하여 100배로 수확이 되며, 풀이 너무 빨리 자리기 때문에 괭이를 잃어버리면 사나흘 후에는 괭이를 찾을 수 없다'고 기록 될 정도다.
당시 키예프 루스는 어떤 나라였을까. 키예프 루스의 사람들은 농업에 종사했다. 다만, '상업'과 '무역'을 통해 유럽의 대국으로 성장한다. 12세기까지 프랑스에서는 모든 견직물을 '루스제'라고 불렀다. 그 어원은 '루스' 상인들이 견직물을 들여왔기 때문이다. 그만큼 '키예프 루스'는 상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농촌 사회를 이루고 있던 시기, 키예프 루스의 도시화율은 상당했다. '키예프 루스'에는 240개의 도시가 있었고 총 13~15%가 도시에 거주할 정도였다. 13세기에 몽골이 키예프를 점령했을 때의 3만5천~5만이 이 곳에 살았다. 이는 유럽 최대 규모였으며 심지어 런던이 이 규모에 도달하기까지 100년이 걸렸다. 같은 시기 키예프 루스의 총 인구는 신성로마 제국과 비슷한 700~800만으로 추정된다. 재밌는 것은 화폐에 있다. 키예프 루스는 '흐리우냐'라는 은조각을 화폐로 사용한다.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한지 5년이 지나고 자국 독립 화폐를 사용했는데, 그 통화 단위가 흐리우냐(UAH)이다.
러시아의 화폐는 루블(Ruble)이다. 루블은 러시아어로 '잘라내다' 혹은 '도려내다'라는 동사다. '루비트'(러시아어: рубить)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것으로 러시아의 화폐 단위가 '키예프 루스'의 은화를 떼어내어 사용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우크라이나인들은 진단 반 농담 반으로 자신들의 정통성으로 러시아인들에게 말하곤 한다. 이들의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다. 몽골의 확장이다. 몽골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전세계가 몽골의 지배로 들어간다. 이 시기 '키예프 루스 대공국'도 몽골 지배로 접어든다. 몽골은 세금을 징수 받는 댓가로 존속을 인정 받고 평화로운 시대를 보장했다. 그 과정 중 재밌는 일이 있는데, 모스크바는 몽골인들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거이다. 몽골은 목초지를 선호한다. 다만 '모스크바'는 삼림지배에 속해 있었으므로 그들의 관심은 남부 스텝 초원지대로 옮겨졌다. 모스크바는 몽골인들의 지배에 비교적 순종적인 편이라, 다른 지역의 징세를 책임졌다. 그 과정에서 모스크바는 더 유복해졌다.
우크라이나는 이후에도 폴란드나 리투아니아의 영향력 확대에 영향을 받는다. 우럽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공국'이라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 유럽이 봉건제후의 영지로 분할되면서 군주가 아니라 '공작(公)'이 통치하는 시기를 맞이하는데, 이들의 세력 확장에 따라, 국가의 형태가 달라진다. 현대의 '중국'의 정체성을 하나로 규정할 수 없듯, 우크라이나 또한 영토로 역사를 바라볼지, 민족으로 역사를 바라 볼 지의 의문이 생긴다. 일본과 한국처럼 영토와 민족이 통일적인 국가도 있지만, 유럽의 대부분 국가들은 이 모습이 상당히 복잡하여 역사를 규정하는 시선이 상당히 달라진다. 18세기가 되면서 유럽의 역사는 굉장히 크게 달라지는데 중앙집권 된 국가들의 힘이 서서히 주변 국가에 영향을 끼치 시작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 등은 중앙집권되어 절대 왕정의 힘으로 강국의 대열에 오르는 반면 폴란드와 같은 분권 국가들은 귀족의 힘이 지나치게 강하고 왕권이 약했기 때문에 점차 외국의 간섭을 받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3국으로 완전히 분할되어 소멸하고 우크라이나도 이 시기에 영토의 80%는 러시아 제국이, 20%는 오스트리아 지배로 들어가게 된다. 정치적으로 18세기에 우크라이나는 완전히 지도에서 사라진다. 이 시기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서 '소(小)러시아'로 불려진다. 지금도 러시아에서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이후 민족운동이 꾸준하게 벌어지며 독립을 투쟁한다.
20세기 초에는 러시아 밀 수출의 98%, 옥수수의 84%, 호밀의 75%가 우크라이나에서 수출됐다. 최대 곡창지대가 되면서 이 지역에는 곡물 수송을 위해 철도 건설이 시작됐는데 이로인해 석탄과 철이 함께 개발되며 돈바스 지방에는 석탄 채굴 산업이 함께 발전한다. 이 시기 우랄 지방의 철광석 생산은 4배 증가한 반면 우크라이나의 생산은 158배 증가함으로써 우크라이나가 공업과 농업으로써 굉장히 중요한 경제적, 지리적 이점이 있음이 확인됐다. 이후 소련시대에는 핵분열, 로켓 기술 등의 다양한 기술이 이 지역에서 나오게 된다. 다만 2차세계 대전에는 소련 전후 피해 40%가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했고 소련 시대에는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건' 등으로 인해 꽤 힘든 시기를 겪기도 했다. 비로소 350년도 넘어서 소련 붕괴와 함께 독립국가로 거듭난 우크라이나는 21세기 러시아와 전쟁을 치루며 앞으로의 시대에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우크라이나의 면적은 러시아 다음으로 넓다. 인구는 5천만이나 되어 프랑스와 필적하다. 석유, 천연가스 자원은 충분치 않지만 철광석은 유럽최대 규모다. 소련 시대에는 최고의 공업지대이자 곡창지대였다. 러시아와 유럽을 잇는 중간 지점인 정치적, 지리적 위치도 앞으로 유망한 국가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역할이 한반도를 닮았다. 이런 가능성은 분명 좋은 기회를 갖기도 하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외부의 침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꽤 복잡한 역사라 일회독으로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알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간략한 이 나라의 역사를 알 수 있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