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리
'상실의 시대'로 유명한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워낙 유명한 작가지만, 그의 책을 읽는 것은 처음이다. 현재 고작 100쪽을 넘어가는 정도를 읽었으니, 이 책이 어떻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다만 왜 하루키가 좋은 작가인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읽기 전, 사람들의 리뷰를 찾아보니 대부분 소설이 야하다는 이야기가 많았으나 그보다 먼저 느껴지는 것은 그가 사용하는 문체다. 그 문체로 느껴지는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살펴보면 그림에 선이 없다. 다빈치는 선이 아니라 명암과 색체만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인 '모나리자'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덧대고, 덧대고, 덧대기를 반복하며 '선'이라는 명료함을 없애고 부드러운 명암으로 사물을 구분지었다. 하루키의 글이 그것을 닮았다. 하루키의 인물묘사는 직접적이지 않았다. 못생겼다거나 예쁘다거나, 키가 크다거나 작다거나의 외부적 특징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고집이 세다거나, 차분하다거나 활발하다는 내부적 특징 묘사도 없다. 그냥 담담히 문장과 문단을 이어 서사하며 독자로 하여금, 상황과 인물을 파악하도록 두었다. 거기에는 '선도 악'도 없고 사랑과 미움도 없다. 그저 담담히 이야기를 서술한다. 그 문체가 다빈치의 그림체를 닮았다는 것은 그것을 말한다. 그림을 공부하던 후임 녀석은 말했다. '그림은 선을 지우는 작업이다.' 연필을 세게 쥐어서도 안되고 꼿꼿하게 세워서도 안되고 꾹 눌러 그려서도 안된다고 했다. 가볍게 쥐고 살짝 눕힌 상태에서 더칠하거나 덜칠하는 방식으로 명암만 주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이 좋은 그림을 완성하는 방법이라고 알려주었다. 실제로 그름일 잘 모르는 내가,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으나, 그가 스쳐지나가며 했던 그 말은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꼭 그림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를 봤다. '더글로리'와 '재벌집막내아들'이라는 드라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크기 만큼, 충분히 재밌게 봤다. 다만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명료하게 구분된 '선'과 '악'의 대립'이 그렇다. '선'과 '악'이 얼마나 명료하면 배우의 표정만으로도 그 캐릭터가 보였다. 이 두 드라마의 특징은 '부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빈자'를 바라보는 시선의 편견, 강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약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있다. 두 드라마에서 '가진 이들'은 욕심 많고, 약자를 괴롭히는 일에 희열을 느끼며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묘사됐다. 이미 표정과 말투에서 권선징악의 어느 부분을 담당할지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류의 떠먹여주는 묘사를 그닥 선호하진 않는다. '하루키'의 글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 판단의 몫을 독자에게 넘겨 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실의 시대'로 초기 출간됐던 그의 저서가 '노르웨이의 숲'으로 재 출간되지 않았나 싶다. 독자로 하여금 소설이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떠먹여 주는 일은 하루키의 문체와 떨어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민음사에서 출간된 원서의 제목인 '노르웨이의 숲'이 조금더 잘 어울린다. 실제 자연에는 '선'이 없다. 바다와 뭍을 나누는 해안선도, 빛을 뿜어내는 태양에도 선은 없다. '선'은 인간이 그것을 구별하기 위해 임의로 설정한 값일 뿐이다. 딸이 보는 영화에는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작가가 설정한 '선과 악'의 개념에 의해 관객은 '선과 악'에 대해 심오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너무나 쉽게 '선과 악'을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역사를 바라 볼 때, 우리가 착각하는 하나가 있다. '선과 악'의 구분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연합국은 '선', 주축국은 '악'으로 구분한다. 민주주의는 '선', 공산주의'는 '악'으로 구분한다. 작가가 설정한 선과 악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념과 정치에는 선과 악이 없다. 그것은 그럼에도 영화 '봉호동 전투'의 일본인 군인들은 조선인 학살을 즐기는 '사이코패스'로 그려진다. 영화 '암살'에서 일본 순사는 가만히 있는 조선 여인의 머리에 권총을 발사한다. 그들에게는 감정이 없거나 '살인'을 즐기는 취향있다는 식의 묘사다. 상대가 '악'으로 학습되면 다음 기회에 '상대'를 해하는 일은 '정의'가 된다. 나와 너, 선과 악으로 선을 긋는 행위는 다시 말하면 이쪽 편으로 공감을 쉽게 일으키지만, 반대편으로 혐오를 쉽게 일으킨다. 납득 가능할 만한 이유가 없는 '악', 납득 가능할 만한 이유가 없는 '전쟁', 납득 가능할 이유가 없는 '사람'. 이들에게는 이유가 없다고 묘사하는 순간, 혐오를 표현하는 행위에도 '이유'가 사라진다. 누군가가 말하듯, 그냥 '야한 소설'이 아니라, 하루키의 소설은 독자에게 굉장히 많은 판단영역을 넘겨주는 소설이다. 등장인물들이 행위에 '전지적 작가'가 판단을 내려 놓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전지적인 판단가가 되도록 한다. 술술 읽히는 문체와 더불어 모든 판단을 독자에게 넘기는 형태로도 이처럼 소설을 전개한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어째서 지금에서야 이 책을 읽게 됐는지, 어째서 지금에서야 하루키의 책을 읽게 됐는지, 참 아쉬울 따름이다. 순간 그의 글을 읽어가면서 내용이 아니라, 문체만으로 철학을 사유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