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독교인이 성경 읽는 이유
7살 아이가 잠들지 않았다.
"늦게 자면 도깨비 나온다!"
아이 키워보니 명료하게 아이를 설득하는 방법이 없다. 생물진화론적으로 '도깨비 종의 분화와 유전형질 전달 과정을 들먹이며 외형적 모순의 유무'을 따지고 드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을 때는 말한다.
"안전벨트 안 매면 경찰 아저씨 잡으러 와!"
안전벨트를 매야 한다고 설명할 때, 도로교통법에 대해 이야기하면 눈높이가 맞지 않는다. 그냥 '경찰아저씨 잡아간다!'가 명료하다.
법리적으로 형사소송법 상, 사법 경찰관이 영장 발부하여 강제 처분할 가능성을 이야기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아이가 밥을 잘 먹는다. 이를 독려하기 위한 칭찬도 한다.
"우와, 밥 맛있게 먹으니까, 금방 언니가 되겠네!"
생물학적으로 식사 한끼에 구성 세포의 양과 크기가 급격히 증가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말한다.
"착한 일 많이 해서,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주겠구나."
도깨비가 나온다거나, 경찰아저씨가 잡으러 온다는 이야기, 밥을 맛있게 먹으니 언니가 된다는 이야기, 착한 일을 많이 했더니 산타가 방문한다는 것은 '참'이 아니다. 그것이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다. 그 때문에 아빠의 이야기가 들을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본질이다. 상대가 왜 그 이야기를 하는가. 3,500년 전, 비계몽 시대에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선각자(先覺者)는 후각자(後覺者)에게 본질을 전달하고자 한다. 대체로 이들은 눈높이를 낮춘다. 아이에게 일찍 자라고 '도깨비'를 소환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인식은 대체로 어린 아이가 성인이 되서도 '도깨비'나 '귀신'을 두려워하게 만들기도 한다.
비과학성을 입증하여 성경의 무가치를 입증하려는 시도는 종종 있다. 이런 일이 따지고 보면 무가치한 일이다. 도깨비 이야기의 비과학성을 입증하는 것이 똑똑한 일일까. 때로 어떤 목사들은 이 함정에 빠져, 성경을 과학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명료하게 말해서 성경에는 공룡이 존재하지 않고 빛이 있으라 하여 빛이 있었다는 창세기를 문자로만 이해하면 그렇다. 자신이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무신론'을 주장한다. 신을 믿는 이들이 '순진하고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자, 그렇다면 따져보자.
마크 저커버그 유대교, 빌게이츠 천주교, 정주영 개신교, 스티브 잡스 불교, 이건희 원불교. 심지어 역대 미국 대통령 46명 중 44명은 개신교 신자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두 명, 존.F.케네디와 존 바이든은 둘 다 천주교 신자다. 왠지 무신론자 일 것 같은 아인슈타인과 일론 머스크는 '신이 있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아이작 뉴턴은 심지어 신학자였다. 내가 이들보다 더 선각자이며 더 대단하다고 볼 자신이 없다. 신을 믿는 것이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라는 생각은 잘못됐다. 앞서 말했듯, 우리 대부분은 '유신론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살고 있으며, 유신론자는 '신'의 지배를 받는다.
이들은 어째서 이처럼 대단한 위치까지 올라가는 것일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바로 '기준선'의 차이다. '신'을 믿지 않고 '자신'만 믿는다는 사람들이 있다. 천동설이 지배적인 시대에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은 '허무맹랑'한 사람이었다. 우주의 중심이 '지구'라는 것은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라는 사고와 닮았다.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기적이게 변한다. 자신을 객관화하는 일도 힘들어 한다. 우리 하나 하나는 소중한 존재임에는 틀림 없지만, 우주에 떠 있는 수 많은 별들처럼, 그냥 그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위대하거나 사악한 다른 인간들도 그렇다. 그냥 수 많은 별들 중 하나일 뿐이다.
지동설은 우리가 먼지나 티끌보다 적은 존재라고 말한다. 지구가 중심이 아니다 보니, 인간은 더 한없이 작아진다. 못생긴 사람이나 예쁜 사람, 돈 많은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 모두 안드로메다 은하에서 바라보면 한 점도 되지 못한다. 둘 다 티끌이다. 위대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점이 이처럼 변한다. '그들도 나와 다르지 않다. 나도 할 수 있다.'의 사고가 생겨난다. 위대한 인물들도 그저 신 앞에 평등하다는 사고가 생겨나면 사람은 움직이는데 수월하다.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마주하는 일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마주하는 일에는 아주 큰 결과적 차이가 있다.
1984년 애플 주식 하나당 가격은 0.1달러였다. 3년 뒤 애플의 주식은 그 3배인 0.3달러로 300%나 상승했다. 3배가 넘는 엄청난 성장이지만 애플 주가 그래프 전체를 살펴보면 그래프는 출렁이지조차 않는다. 그저 일직선으로 보인다. 이유는 2023년 주가 가격이 154불이기 때문이다. 비교절대값이 높아지면 모든 것은 평등해진다.
절대값을 '인간'의 기준이 아니라 '신'의 기준에 두는 것. 그것은 몹시 중요하다. 가끔 로또 1등 당첨자가 빚더미에 앉았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어찌된 영문인지, 큰 돈을 받았지만 금새 날아가 버린다. 이유는 단순한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그릇'이 있다. 자신이 포용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면 인간은 '공포'를 느낀다. 다만 '신'을 믿는 자는 '인간의 그릇'이 아닌 '신의 그릇'을 대용한다. 대부분의 사업가들이 일정 수준의 규모까지 성장하면 이내 은퇴를 하거나 사업확장을 멈추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그릇만큼만 성장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을 다루거나, 큰 국가를 경영하거나, 큰 돈을 버는 사람일수록 '신'의 그릇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사물'과 '현상'을 모두 아는 것을 '전지적 시점'이라고 한다. 신을 곁에 두는 것은 전지적 시점을 갖는 일이다. 그것은 아인슈타인, 빌게이츠, 일론 머스크, 미국 대통령 할 것 없이 평등하게 만든다. 나에게는 한없이 위대하고 높은 사람이지만, 신의 입장에서 그들과 나 또한 출렁이지 않는 직선과 닮았다. 이런 시각은 인간이 넘지 못할 선을 우습게 넘게 한다. 죽음과 빈곤까지 모두 초월한 '행복'의 기준선이 생기는 것이다. 어떤 스트레스나 고민도 우주적 존재 앞에서 티끌일 뿐이다. 창피한 일, 무서운 일, 슬픈 일, 기쁜 일 모두 티끌이다. 무서운 사람, 무서운 존재도 모두 티끌이다.
절대자는 언어 그대로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한다. 세상 살다보면 부모형제 조차 날 믿어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실제 나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자신'조차 '자신'을 모른다. 이때, 무조건 나를 알아주는 '대상'이 있다. 심지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존재가 있다. 그 존재는 존재만으로 큰 위안을 준다. 사람은 힘든 일을 당하면 위로 받을 사람을 찾는다. 안타깝게도 이 상황에서 때로는 타인에게 이용당하거나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다만 '절대자'와 함께 한다는 믿음은 외로움이나 고통에 대한 위로를 인간이 아니라 '절대자'에게 한다. 즉, 혼자서 해결할 힘을 갖는다.
혹자는 '눈의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에 대해 의심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이에 관한 설명을 해보자. 미술에는 '점묘법'이라는 것이 있다. '그랑드 쟈트 섬에서의 일요일 오후'라는 그림이 그중 하나다. 이 그림은 붓 끝이나 브러쉬를 통해 여러색의 점을 찍는 방법으로 그림을 완성한다. 만약 이 그림 오른쪽 여인의 치마에 개미가 앉았다고 해보자. 개미는 온통 빨간 점과 파란 점만을 보고 살 것이다. 이것이 개미가 바라보는 세상이다. 만약 개미가 풀밭 쪽으로 이동하여 처음 초록색 점을 만나면 어떨까. 개미의 입장에서는 그림 전체를 볼 수도 없을 것이며 새로운 패턴에 당황하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눈에 보이는 것의 차이란 그렇다. 1인칭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이 전지적 절대자적 시점에서는 명확하게 보인다. 불교 경전 '열반경'에는 맹인모상(盲人摸象)이라고 있다. 장님의 코끼리 만지기다. 눈을 감은 이들이 코끼리를 더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는 더 세밀하게 대상을 다듬을 것이 아니라, 감고 있는 눈을 떠야 한다.
신을 믿는자 들이 실패에 무감각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신의 뜻'이라는 언어 때문이다. '어떤 실패에도 '의미가 있다'며,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도 꽤 이점이다. 신을 믿는 자들은 때로 자신의 아이를 신에게 받친다. 자신의 아이를 신에게 받치는 일을 보며 누군가는 '무정한 모정과 부정'을 탓한다. 꼭 그럴까.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라는 것을 인지하면 지나치게 막 다루며 편하게 이용하고자 한다. 인간의 소유욕 때문이다. 자신의 아이를 소유하는 것 보다 자신의 아이를 '절대자'의 아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고귀하게 아이를 대하기도 한다.
자식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사람에 대해 무한적인 신뢰와 사랑을 한다. 신의 피조물에 대해 사랑과 신뢰를 한다. 고로 '용서'라고 따로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용서'하기도 한다. 모두가 신의 자식이라는 믿음은 상대에 대해 믿음을 준다. 세상에는 절대적인 믿음을 갖는 사람보다 절반의 의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상대적인 선택을 한다. 상대가 배풀면 배풀고, 상대가 경계하면 경계한다. 고로 경계를 먼저 취하는 사람보다는 '신뢰'를 먼저 취하는 이들이 '신뢰'를 얻게 될 확률이 높다. 상대가 '신'의 아들과 딸이라는 유대감은 '신뢰감'를 만들고 그것이 사실상 인류의 발전을 만들었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기독교'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종교'이다. 특정한 문화에 소속하지 않고 '성경'과 '신'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있다. 신을 믿는 이들이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을 보곤 한다. 최근 무신론자였던 일론 머스크가 입장을 바꾸어 '무언가가 있다'라는 믿음을 가졌다. 그 밖에 다양한 이들이 '특정 종교'을 언급하지 않고 '신의 존재'에 대해 인정하기도 했다.
"돈 벌게 해주세요.", "행복하게 해주세요" 등 신을 향한 기도의 목적이 인간의 사적 욕심을 채우는 '심부름'이 되는 이유는 고대 종교의 샤머니즘 영향이다. 원래 기도는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고 신에게 감사하는 일이다. 나와 당신을 포함해 지구와 달, 은하 우주 모두를 통칭하는 '하나'를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다른 신을 무시하는 '유일신'의 불통이 아니라 전체를 포괄하는 절대자다. 그것은 인생이 될 수도 있고, 자연이 될 수도 있고 우주가 될 수도 있다. 이름은 짓기 나름이다.
성경책을 구매했다. 현재 하고 있는 일들이 너무 많아, 어느정도 정리가 되면 2023년 내로 성경 통독을 할 예정이다. 어쩌면 하나 하나 기록해 볼 요량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