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잔 첫번째 이야기 1

1-1 프렌치 75

by 이세

“사장님!”


익숙한 목소리였다. 혜진은 이제 막 입구 옆 간판에 불을 켠 참이었다. 아직 손님이 들이닥치기엔 이른 시간이라 생각하며, 혜진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퇴근하자마자 여기로 뛰어왔어?”

“속에 천불이 나고, 목이 마르네요. 뭐 시원한 거 없을까요?”


무슨 일인지 코 끝이 찡그려진 윤경이 자리에 앉자마자 주문을 했다. 느긋이 LP판을 고르던 혜진이 Bar로 들어가 분주히 손을 놀렸다. 윤경은 종종 퇴근 후, 동료들과 1차를 하고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이곳에 들르곤 했다. 대부분 혼자였지만, 가끔은 동료들과 함께 오기도 했다. 그녀는 늘 사파이어 토닉을 주문했다. 소주를 좋아하는 윤경의 입맛에 가장 비슷하고 단맛이 적은 칵테일이었다. 혜진은 그런 윤경이 제법 주량이 셀 것 같다고 짐작만 했다.


“오늘은 이걸로 마셔봐. 천천히 마시고!”


혜진의 당부가 무색하게 윤경은 혜진이 내민 칵테일을 원샷하듯이 벌컥 소리를 내며 마셨다. 잔은 금세 절반이나 비어 있었다.


“어머 이게 뭐예요?”


동그란 눈으로 묻는 윤경에게 오묘하게 웃으며 혜진이 대답했다.


“프렌치 75. 늘 같은 것만 마시길래. 새로운 것도 한번 맛보라고.”

“이거 너무 좋은데요? 상큼하고 막 터져요. 보글보글.”


윤경에게 칵테일을 음미할 시간을 주기 위해 혜진은 Bar에서 나왔다. 어느새 오후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오레오가 야옹거리며 혜진의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혜진은 재빠르게 가게 한편에 반듯하게 차려둔 고양이 식탁에 깨끗한 물과 사료를 채워 놨다. 오레오는 고맙다는 듯 다시 야옹 소리를 길게 내고는 하얗고 동그란 사기그릇 앞에 얌전히 앉았다. 밥 먹기 전 손을 씻듯이 양발을 깨끗이 핥더니 오독오독 소리를 내며 맛있게 밥을 먹었다. 날렵하고 가녀린 체구의 혜진이 또다시 몸을 틀어 이번에는 진열된 LP 장으로 다가갔다. 긴 손가락으로 음반을 한 장 한 장 튕기며 영수증 뒤지듯 음반을 골랐다.


“오늘은 이걸로 틀어볼까?”


혼잣말하듯 나지막하면서도 단호하게 턴테이블 위에 동그랗고 납작한 음반을 올리고 바늘을 얹었다. 음표가 지면으로 떨어지듯 통통거리는 리듬으로 깔리는 피아노 음색이 서늘한 공기를 채우자 윤경이 숨을 토하듯 말을 시작했다.


“아 오늘 정말 참을 수가 없었어요. 속이 터질 것 같아서 말이죠.”


프렌치 75에 들어간 칵테일의 탄산조차 오늘 윤경의 울분을 다 터트리지 못하는 듯했다. 어느새 식사를 마친 오레오가 윤경에게 다가와 눈인사를 건넸다. 오레오는 하얀 털 바탕에 회색과 검은색 줄무늬가 잘 짜인 흔히들 고등어라 부르는 털옷을 입은 고양이였다. 작년 2월 가게 앞에 비닐로 싸서 버려진 새끼고양이를 혜진은 품에 안아 보듬기 시작했다. 그 후로 오레오와 혜진은 “달잔”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가게 안팎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길고양이나 다름없이 사는 오레오를 윤경은 늘 따뜻한 손길로 귀여워해주었다.


“야옹”


오레오가 참견하듯 울음소리를 내었다.


“아니 우리 차장님 이제 윗분들 눈치 안 보고 칼퇴해도 되는 가봐? 애들은 누가 보구?”

“에이 참, 저도 이제 짬이 되거든요? 그리고 오늘은 남편이 일찍 와요.”


껑충 테이블 위로 올라온 오레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윤경이 말을 이어갔다.


“오늘 인사발령이 있었어요. 세상에 이 조직은 사람 보는 눈이 이렇게 없나.”


거친 숨소리처럼 일그러진 얼굴의 윤경이 불의를 토하듯 피아노의 잔잔한 멜로디 사이사이로 감정을 쏟았다. 혜진은 음반을 얹고 나서야 이제 준비가 다 되었다는 듯 다시 Bar로 돌아가 윤경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레오도 고롱거리며 윤경의 팔에 기대앉았다. 윤경은 오레오의 이마를 잔잔히 쓸면서 부드러운 선율과 함께 15년 전의 시간을 꺼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