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라벤더 진 피즈
3월의 토요일 밤, 유난히 “달잔”이 북적였다. 이른 시간 맥주를 마시러 왔던 상현은 “달잔”에 손님들이 차오르자 서둘러 일어나 나가 버렸다. 상현의 지정석인, 그가 앉아 오레오와 장난을 치는 테이블을 빼고는 “달잔”이 꽉 채워졌다. 사람의 열기에 오레오마저 달떠서 저녁 마실을 나갔다. 오늘따라 토요일 저녁 육퇴를 마친 윤경이 밤을 기념하며 Bar에 앉았다. 다리를 건들거리며 리듬을 맞춰가면서.
혜진은 마치 빠른 잔상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테이블 사이를 분주히 움직이며 주문을 받고 칵테일을 만들고 그릇을 정리하고 안주를 내어주며 손님들을 살폈다. 한 테이블에서는 한 남자가 나머지 세명의 남녀에게 청첩장을 돌리고 있었다. 환한 얼굴로 겸연쩍은듯 청첩장을 내미는 그는 단지 돌려받아야 할 채권이 아닌 새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저렇게 얼굴을 맞대고 종이 청첩장을 나눠줄 정도면 정말 돈독한 사이인가 보다 혜진은 생각했다.
‘그렇지. 3월부터 청첩장의 시즌이지. 암.’
이제 혜진의 주변에는 본인의 청첩장을 나눠줄 지인이 없었다. 이미 결혼을 했거나, 돌아왔거나, 포기했거나 그런 이유들로 말이다. 혜진은 다시 가볍게 몸을 놀리며 안주를 내주고 테이블을 정리하며 오갔다. 오늘처럼 분주한 날에는 턴테이블에 음반을 올려 놓을 수 없었다. 혜진은 스트리밍 앱을 켜고 추천 List를 눌렀다. 달콤한 목소리로 “기다린 만큼, 더”가 흐르기 시작했다. 다음 순서로 봄눈, 장범준의 샴푸향, Everything, 거리에서 등이 대기하고 있었다.
눈앞에 닥친 바쁜 일거리를 해치우고 혜진은 윤경을 향해 눈인사를 찡긋했다. 윤경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언니, 오레오는 어디 갔어요?”
혜진이 대답했다.
“놀러 나갔나 봐. 배고프면 돌아올 꺼야. 윤경씨도 놀러 나온 거야?”
윤경이 까르르 웃으며 대답했다.
“네. 오랜만 에요. 남편한테 애들 맡겨두고 왔죠. 뭐.”
그녀의 표정이 유난히 환했다.
“잠시만 기다려 줄래? 오늘도 소개해줄 새로운 한잔이 있거든.”
혜진의 말에 윤경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 때 “달잔”의 입구에서 찬바람이 불었다. 긴 웨이브 머리에 풀메이크업을 하고 정장을 차려 입은 젊은 여성이 휘청거리며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혜진은 서둘러 인사를 하며 비어 있는 윤경의 옆자리를 내주었다. 윤경 역시 주변을 정리하며 살짝 자리를 비켜 앉았다. 휘청거리며 들어온 여성은 풀썩 쓰러지듯 혜진이 내어주는 의자에 기대듯 주저앉았다. 어딘지 모르게 눈빛이 시리고 물기를 머금은 듯 보였다. 서연은 조금 전까지 여동생의 결혼식에 있었다. 오늘은 두 살 터울 여동생의 결혼식이었다. 서연은 조금 전까지 자신을 둘러싼 눈빛과 당혹감을 떠올리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서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얼음물 한잔 먼저 마실 수 있을까요?”
“네 그럼요”
혜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혜진은 아무래도 윤경에게 양해를 구하고 지금 막 들어온 손님에게 먼저 오늘 만들려던 칵테일 맛을 보여 줘야겠다 생각했다. 깨끗한 유리잔에 얼음을 담고 레몬조각 한 개를 올려 얼음물을 내주며 혜진이 서연에게 물었다.
“괜찮으시면 제가 칵테일을 하나 추천해드려도 될까요?”
“네. 안 그래도 머리가 지끈거려서 고르기 어려웠어요. 감사합니다.”
서연은 짐을 덜었다는 듯 미소 지었다. 혜진은 재빠르게 윤경에게도 곧 칵테일을 내어주겠다고 귀 뜸을 했다. 윤경 역시 단골의 감으로 대번에 느꼈다. 옆자리에 막 앉은 손님을 잠시 기다려 주어야 겠다고. 혜진이 다시 또 분주해졌다. 둥글고 봉긋한 잔을 골랐다. 진과 레몬즙, 그리고 보라빛의 라벤더 시럽을 섞었다. 작고 화사하게 라벤더 꽃을 올려 서연의 앞에 올려주었다.
“라벤더 진 피즈 예요. 천천히 드세요”
혜진의 부드러운 목소리 때문인지 몸과 마음을 감싸는 라벤더 향 때문인지 서연은 두통이 조금씩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우아한 보라빛이 “달잔”의 은은한 조명 밑에서 더욱 몽롱하게 아름다웠다. 서연은 라벤더 진 피즈로 빠져들었다. 그녀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는 것을 확인한 후 혜진은 다시 두번째 라벤더 진 피즈를 만들어 기다려준 윤경에게 내어주었다. 나란히 앉은 두 여자의 입술에서 탄성이 터졌다. 그녀들은 보라빛 그윽한 향에 휘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