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손을 잡고 함께 갑니다
내가 6살이 되었을 때, 나의 증조할머니는 여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빠와 나이터울 많이 지는 고모들의 뒤를 이어 증조할머니 교회 가는 길을 동행하는 ‘종그래미’ 역할을 맡았다. 효심은 깊었으나 신앙은 없었던 나의 할아버지는 본인을 대신해 모친의 주일예배에 자녀나 손녀를 보냈다. 그렇게 6살의 내게 임무가 주어졌다.
유치원에 가는 날에도 밥을 입에 문 채 꾸물대다가 혼나기 일쑤였던 나는, 주일 아침엔 가뜩이나 마음이 바쁜 증조할머니의 눈총을 받으며 간장계란밥을 삼켰다. 우리 집은 숙대 언덕 아래 일방통행 길 입구에 있었고 증조할머니와 나는 만리시장 맡은 편에 있는 ‘만리현교회’까지 가야 했다. 나이가 들어가며 점차 몸이 불고 걸음이 늦어지는 그녀를 위해 가는 길은 누군가 차로 데려다줬다.
그 무렵 ‘만리현교회’는 새 성전 건축을 위해 헌금을 모으고 있었다. 매번 교회 앞을 지나며 번듯하게 지어진 새 건물을 볼 때마다 보라색 천 원 구권을 꼬깃꼬깃 봉투에 넣던 할머니의 쪼글쪼글한 손이 떠오른다. 차에서 내려 예배당에 들어가면 그녀보다 한참 젊은 조효례 권사님이 늘 곁에 앉았다. 조권사님의 목소리는 염소 같았다.
어른 예배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또래 아이들은 아래층에서 색색의 그림성경을 보며 찬양도 하고 간식도 받는데, 나는 긴 의자에 꼼짝없이 붙어 있어야 했다. 목사님의 인도에 따라 일어서고, 앉고, 찬송가를 부르는 시간은 그나마 견딜 만 했다. 어쩌다 ‘나의 사랑하는 책’ 같은 따라 부를 수 있는 찬송이라도 나오면 맘이 잠시 들떴다. 예배 중간부터 시작해서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목사님의 긴 설교가 시작될 때면 이미 내 몸은 배배 꼬인 상태였다. 목사님의 설교말씀은 매번 아득하게 멀어지곤 했다. 지겨움. 끝날 줄 모르는 설교. 그 긴 시간들 덕에 나는 글을 몰랐던 6살에도 주기도문은 흉내 내듯 외울 수 있었다. 예배가 끝나면 계단 위에 식당에서 잔치국수를 먹었다. 매주 똑같은 메뉴였지만 어쩌다 들려 먹는 휴게소 우동보다 훨씬 맛있었다.
예배가 끝나고 누군가 마중을 오면 내 임무는 종료였다. 그러나 종종 돌아오는 길은 증조할머니와 둘이 만리재 고개를 넘어 효창공원과 숙대 후문을 지나 걸어 내려와야 했다. 작고 팔팔한 6살 어린이는 몇 걸음 걷다 가쁜 숨을 쉬는 여든의 노파의 심정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왜 자꾸 맨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리는지 두고 갈 수도 없이 부끄럽기만 했다. 나는 증조할머니의 손을 힘껏 잡아 끌며 이제 그만 일어나라고 볼멘소리를 여러 차례 했다. 맨손으로 누런 코는 왜 자꾸 팽팽 푸는지 증조할머니가 길바닥에 누런 코를 뿌리고 옷에 훔칠 때면 누가 볼 새라 숨고 싶기만 했다.
나의 증조할머니는 스물이 되기 전에 시집을 와서 아들 둘을 내리 낳았다. 새파랗게 젊은 새댁이 아들 둘을 품에 안고 한참 행복에 겨워야 할 때 나의 증조부는 첩장가를 허락해달라며 집 대청마루에 드러누우셨다. 과부 꼴이 되어 버릴 그녀의 처지가 안쓰러웠는지 시어머니가 손을 잡아 교회에 보내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뒤로 증조할머니는 딸 셋을 더 얻었고 더불어 줄줄이 남편의 첩도 셋을 더 얻었다. 그때부터 일 평생을 하나님께 의지하며 견뎌내신 인생이었다. 그런 그녀의 숭고한 주일 의식을 나는 돕고 있었다.
증조할머니를 제외한 가족들 중 그 누구도 꾸준히 교회를 가진 않았다. 다만 모든 가족이 그녀의 종교를 존중하는 것으로 그녀의 인생과 헌신에 숭고함을 표시했다. 우리 집은 소위 말하는 종갓집이었고, 일 년이면 명절제사를 빼고도 열 번이 넘게 기제사를 지냈다. 그렇게 가부장적 유교 패밀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증조할머니 살아생전에는 그녀의 방식대로 모든 제사가 진행되었다. 그래서 우리 집은 ‘홍동백서 조율이시’에 따라 제사상을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놓고는 모두가 그 앞에 모여 앉아 찬송을 부르는 진귀한 풍경이 펼쳐졌다.
나는 어렸고 성경도 율법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집에서 유일하게 성경을 읽는 건 증조할머니뿐이었다. 그녀는 음식을 차려두고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를 숭배하며 절하면 안 된다고 했다. 무언가 이상했지만 모두가 그녀의 말을 따라 제사상을 정성껏 차려둔 채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불렀다. 아무도 절은 하지 않았다.
나의 할머니는 불교 신자였다. 고부간에 첨예한 갈등처럼 두 분의 종교는 매우 달랐다. 그래도 증조할머니는 며느리의 종교를 미워하지 않았고, 할머니는 시어머니의 종교를 존중하셨다. 증조할머니를 따라 ‘종그래미’의 역할을 하며 교회를 따라가던 고모들 중 한둘은 나중에 성당에 다니기도 하고 교회를 다니기도 했다. 나의 부모님은 늘 본인들이 무신론자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엄마가 마음이 힘들 때 무의식적으로 외할머니처럼 아버지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처음에는 증조할머니의 주말 예배를 도우려 교회에 가기 시작했고 곧 자기 전에 주기도문을 외우고 하나님께 하루를 기도하며 잠드는 아이가 되었다.
성경 내용은 전혀 알지 못했다. 목사님의 설교는 늘 어려웠다. 다만 부활절에 나누어주던 삶은 달걀, 성탄절의 긴 예배, 열두 제자와 배신자 유다 이야기는 뚜렷이 기억 속에 남았다. 나는 점점 자랐고 꽤나 큰 언니가 될 무렵 증조할머니의 교회 ‘종그래미’ 역할은 내 여동생 차지가 되었다. 지겨웠던 주말 설교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느꼈다. 비록 주말 예배 임무는 끝났어도 저녁마다 잠자리에 들 때 하나님께 나의 하루를 기도드리는 일과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주님께 의지하고 그를 두려워하며 나의 하루를 감사하기 위해 기도했다.
나는 계속 자랐고 증조할머니는 점점 더 늙어갔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엔 증조할머니는 더 이상 주말 예배를 갈 수 없게 되었다. 아예 집 밖 외출이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가끔씩 조권사님이 집에 와서 증조할머니를 위해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셨다. 나의 증조할머니는 아흔을 바라보는 치매 노인이었고 나는 한참 밖으로 나돌 사춘기 소녀였다. 점점 달콤한 주말늦잠이 익숙해지고 기도 없이 잠드는 날이 많아졌다.
중학생이 되면서 나는 새로운 나의 재능을 발견했다. 언어 감각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수학과 과학 영역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 과학고등학교에 진학을 했고 자연스럽게 대학에서의 전공도 자연과학을 선택했다. 희한했다. 자연과학과 종교는 매우 다른 분야라는 선입견이 내게는 확실히 있었다. 현대 과학을 전공하는 내가 종교에 심취해 순수한 학문을 방해받고 싶지는 않았다. 진화론을 배우고 ‘리처드 도킨슨’의 이기적인 유전자를 흥미롭게 읽은 내게 이제 종교란 한 물 간 구세대 유물 같은 거였다. QT책을 들고 다니는 동급생들을 보면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고 성경은 교회에서 공부하지 왜 학교까지 들고 오는 걸까 싶었다.
그렇게 긴 시간을 떠올리지 않으려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아 놓고 지냈다. 때때로 친구가, 주변 누군가가 또는 어쩌다 만난 회사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느냐고 물어보면 마음이 돌덩이 눌린 듯 무거웠다. 나는 교회 근처도 가기 싫었다.
"저는 사실 어려서 교회를 다녔고 지금도 마음 깊은 곳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있어요. 그렇지만 지금 교회에 다니고 싶진 않아요.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인생을 보고 자연스럽게 이끌리게 되는 것 그게 선교라고 생각해요."
이런 대답을 하고는 했다. 세련되게 잘 거절했다고 만족하며 주말의 늦잠과 자유로운 나의 영혼을 지켜냈다고 믿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하게 주말의 게으름을 사랑하는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외할머니는 나에게 태교 하라며 성경책을 선물해 주셨다. 나는 책꽂이 어느 편에 꽂아두고는 먼지만 묵혔다. 언젠가 아이들이 자라 세상의 다양한 종교에 대해서, 그리고 엄마의 종교에 대해서 물어보면 유식한 척은 해야 했다. 자식들이 자라 어떤 종교를 선택하든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 줄 생각이었다.
작은 아이가 2학년이 되던 해였다. 워킹맘이던 나를 위해 한집에서 육아를 도와주시던 시어머니가 이제 본가로 돌아가시게 되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려고 열심히 시터이모님을 찾아 헤맸다. 공급자와 수요자를 연결시켜 주는 앱에 나의 요구조건과 원하는 내용을 올리고 대여섯 분의 면접을 진행 후 최종적으로 한 분을 모시게 되었다. 환갑을 넘기지 않았고 인상은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단정하고 깔끔한 옷차림과 표정으로 우리 집에 면접을 오셨다. 본인도 간호사로 아이를 키워봤던 경험이 있어서 워킹맘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고도 하셨다. 일하며 키워낸 아들이 드디어 대학에 진학했고 그래서 이제 여유시간에 시터일을 시작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리고 꼼꼼하게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 간의 농도는 어떤지, 내가 바라는 부분은 무엇이고 아이들의 성격은 어떤지를 메모하고 돌아가셨다.
특히나 내 마음에 큰 가점을 주었던 항목은 그분이 친정 앞에 대형교회에 다니고 계시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수요일은 기도회에 가야 하니 꼭 7시 반 전에 퇴근시켜 달라는 것 하나가 그분의 요구조건이었다. 그 정도야 얼마든지 당연히 맞춰드려야지. 말씀 안에서 사시는 분이라면 아이들에게 나쁜 행동은 하지 않으시리라 믿었다. 그렇게 기대감을 갖고 그분께 우리 집 문을 열어드렸다.
첫날은 내가 연차를 내고 아이들과 그분과 같이 있으며 그분을 살폈다. 틈틈이 세탁기, 건조기, 청소기 등등 가전제품 사용법도 알려드렸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반찬, 간식들과 이럴 땐 이렇게 대처해 달라는 부탁을 드렸다. 손 가는 영유아 아이들이 아니었기에 아이들 등하원과 간단한 집안 살림을 부탁드렸다. 그분은 영 살림살이에는 관심이 없으셨다. 그래도 아이들 옆에는 바짝 붙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는 살갑게 해 주셨다. 남의 집 살림이라 스스럼없이 나서서 하시기가 어려우신가 보다 생각했다.
둘째 날 집에 와보니 손바닥 만한 접시에 계란말이 한 접시가 식탁 위에 놓여있었다. 계란 껍데기와 소금이 서걱서걱 씹혔다. 빨래바구니엔 빨래가 한가득 그대로 있고, 심지어 세탁기 안에 빨래 돌려놓고 널지 않은 퀴퀴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 빨래도 한가득 이었다. 아이 방엔 놀면서 오려둔 색종이가 바닥에 잔뜩 잘려 있었다. 이모님은 아이와 놀아주다 보니 시간이 많이 부족했노라며 내 얼굴만 확인하고는 쌩 집으로 가셨다.
‘그래 아이들 진심으로 대해 주시는 게 중요하지, 뭐.’
애써 위안하며 후다닥 아이 밥을 먹이고 세탁기를 다시 돌리고 건조기에서 옷을 빼서 수건을 개키고 설거지를 치우고 나니 밤 9시가 훌쩍 넘었다. 셋째 날 집에 오니 먼저 퇴근한 남편이 나를 방으로 불렀다.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이모님은 벌써 퇴근하신 뒤였다.
“왜? 무슨 일인데?”
외출복을 갈아입으며 그의 말을 한 귀로 들으며 얼핏 식탁 위를 확인하고 집 상태를 스캔했다. 어제와 별 다를 게 없었다. 세탁기에는 또 물에 젖은 빨래들이 한가득 이었고, 아침에 아이들이 벗어 놓은 잠옷들은 바구니 안에 그대로였다. 오늘은 저녁 반찬이라 할만한 것도 없었다. 걸레질은커녕 청소기도 한번 돌아가지 않는 바닥상태였다. 남편이 집에 오니 이모님은 또 쌩하니 가셨는데 이 상태였다고 했다. 아이들한테 하루 종일 무얼 했냐 물었더니 이모님이랑 하루 종일 하나님에 대해 듣고 성경공부를 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이가 하나님께 쓴 편지를 들고 왔다. 남편은 화를 냈고 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내가 바랬던 건 신앙심이 아이들을 대할 때, 따뜻함과 사랑의 에너지를 내길 바랐던 것이지, 시터이모님이 본인의 신앙을 나의 아이들에게 키워주시길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시간이 없다 이유로 모든 집안일은 다 보이콧한 상태였다. 그놈의 지겨운 설교를 하려고. 혼탁했던 머릿속에 화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한 편으로는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이미 우리 집의 위치와 우리 아이들의 얼굴까지 집 비밀번호까지 공유해 드린 후였다. 나의 불쾌한 감정을 있는 힘껏 표현하기도 어려웠다. 불 꺼진 방 안에서 넋 나간 사람처럼 한참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피 같은 휴가를 냈다. 이미 시터이모님을 구하기 위해 구인, 면접, 수습의 지난한 과정을 겪느라 지쳤지만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그분께 전화를 걸어 내일부터 나오시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드렸다. 보여주신 마음은 감사하지만 종교적인 부분은 부모인 내 몫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적당한 때가 오면 아이들에게 종교적인 부분은 내가 접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건조한 이별을 하려던 찰나, 격앙된 상대방의 목소리가 점점 울리며 넘어왔다. 이렇게 신앙 없고 믿음 없는 가정에서 아이들이 대체 무얼 배우며 자라겠느냐며 지금 나의 아이들이 어떤 대화를 하고 있는지는 아느냐며. 낮에 둘째 아이가 차고 있는 팔찌에 대고 요정에게 소원을 비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절대자에게 기도하지 못하고 잡신에게 소원을 비는 아이를 보고 도저히 청소고 요리고 그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했다.
“아 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어쨌든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더 이상 목소리 높여 화내지 않았다. 아니 저희 아이는 이제 겨우 9살이고 팔찌의 요정에게 예쁜 인형이 갖고 싶다고 동심에 기대 소원 좀 빌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내렸다. 그렇게 해프닝들이 지나가면서 나는 이사를 했다.
이제 나의 아이들은 자라고 나는 점점 흰머리와 주름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사 와서는 3학년이 된 딸이 나에게 교회에 가고 싶다고 했다. 늘 세련되게 교회에 가자는 말을 거절해 왔던 내가 이번에는 그 어떤 말로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니,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딸의 핑계를 대며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교회를 찾아갔다. 마침 회사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료가 오래 다녔던 교회였다. 껄끄럽고 거슬리는 마음이 들 때마다 그냥 딸아이 핑계를 앞세웠다. 교회에 갈 때도 딸아이의 손을 꼭 잡고 갔다.
내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어린이 예배에는 나 대신 딸이 갔다. 일요일 아침 10시 50분이면 둘이 손을 잡고 걸어가서 1층 입구에서 이따 보자며 헤어진다. 예전 나의 증조할머니가 그러했듯 딸아이에게 매주 헌금을 하라고 천 원을 쥐어준다. 딸아이는 가서 율동도 하고 찬양도 하고 십자가도 만들어 가져온다. 이번 여름에는 여름성경학교도 참여했다. 나는 이제 내 몸에 맞는 옷을 입듯 당당히 어른 예배에 간다. 6살의 나에게 너무나 길고 지겨웠던 예배가 요즘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느낌이 든다. 목사님의 설교도 지겹기는커녕 귀에 쏙쏙 들어오고 어떤 날은 박장대소하기도 어떤 날은 눈물을 짓기도 한다. 어른이 되고는 잠들기 전에 하나님께 나의 하루를 기도하던 습관을 되찾진 못했다. 그렇지만 종종 그분께 투정을 부려보긴 한다.
‘왜 이제야 저를 부르신 거예요. 도대체.’
어느 날, 딸아이가 말했다.
“엄마는 아직 진짜 신앙은 없는 거 같아. 수시로 기도하지 않잖아.”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 엄마는 아직 서툴러. 그래도 교회에 가면 마음이 좋아. 그냥 재밌어.”
“나도 그래. 엄마, 나도 재밌어”
나는 여전히 믿음이 열렬하지도, 맹목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주일마다 딸과 손을 잡고교회를 향해 걷는 지금이 참 좋다. 어쩌면 나에게 신앙은 “딸”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나를 교회로 이끄는 힘이 무엇이건, 우리는 함께여서 즐겁다. 언젠가 남편과 아들도 기꺼이 발걸음을 옮기게 될 날이 오리라 믿는다. 오늘도 나는 딸과 나란히 걷는다. 늦여름 햇살 속에 반짝이는 교회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속삭인다.
‘주님, 우리 걸음이 오래도록 함께하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