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드러지는 벚꽃, 흩어지는 불꽃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떨어지는 4월이었다. 혜진은 매일 조금 더 일찍 출근해서 가게 앞을 쓸었다. 입구에서 내려오는 계단과 “달잔” 출입문의 오레오 전용 문까지. 작은 털뭉치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날카로운 눈썰미로 털고, 쓸고, 닦아 댔다. 고양이와 함께 한다는 건 필연적인 부지런함, 지속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부지런함이었다. 오레오는 대부분의 배변을 “달잔” 외부에서 해결했다. 혜진이 “달잔”안에 놔둔 고양이 화장실이 있었지만 오레오는 거의 쓰질 않았다. 혜진이 차려준 저녁 식사를 맛있게 하고 오레오는 흩날리는 벚꽃에 이끌려 ‘야옹’ 인사를 하고 마실을 나갔다.
하늘하늘 날리는 꽃잎 가득한 바깥과 다르게 유독 달잔의 공기가 무거운 날이었다. 요새 들어 자주 오던 상현도 보이지 않았다. 손님이 없는 틈을 타 혜진의 손이 분주해졌다.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듯 혜진은 자신을 위해 칵테일 한잔을 만들었다. 평소에는 잘 만들지 않는 “블랙맨해튼”이었다. 묵직하고 커다란 잔을 꺼내 굵직한 얼음들을 채웠다. 라이위스키를 넣고 아마로와 허브향의 비터스를 넣어 살살 저었다. 원래는 새빨간 체리 한 알을 가니쉬로 올려야 하는데 혜진은 그냥 레몬 한 조각을 올려 마무리했다. 오늘 같은 날은 스스로를 위해 ‘닐스 프람’의 ‘Ambre’ 피아노곡을 틀어도 좋을 것 같았다. 서두르지 않고 재촉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걷는 듯한 피아노 선율이 다정하진 않아도 마음을 차분하게 했다. 크게 변하지 않는 높낮이가 만드는 선율을 따라 혜진의 어깨가 가볍게 흔들거렸다.
서늘한 바람이 일며 묵직한 덩치의 한 남자가 표정 없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시겠어요?”
혜진이 싱긋 웃으며 손님을 맞았다. 큰 키는 아니지만 다부진 체격의 남자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혜진은 그 남자를 Bar 가운데 자리로 안내하고 메뉴판을 건넸다. 남자의 눈길이 빠르게 메뉴판을 훑었지만 한 곳에 멈춰 서지 못하고 있었다. 혜진은 일단 작고 예쁜 접시에 유리알 같은 견과류를 담아내었다.
“천천히 고르시고 신청곡도 받아요.”
그는 조금 전 집에서 아내와 심한 말다툼을 하고 나온 터였다. 윤재는 여전히 머리가 멍했다. 조금 전까지 무슨 이야기를 들었고 무슨 이야기를 내뱉었는지조차 어지러웠다.
“혹시 일상으로의 초대나 불멸에 관하여 들을 수 있을까요?”
윤재가 칵테일보다 신청곡을 먼저 주문했다.
“네, 마침 유작앨범이 있어요”
혜진은 윤재가 마음을 가다듬길 기다리며 LP 판을 가다듬어 올렸다.
“혹시 메뉴 정하지 못하셨으면 제가 추천 하나 드려도 될까요? 오늘 제가 마시고 있는 건데 블랙 맨해튼이에요. 담백하고 쌉쌀해서 생각정리하기 딱이죠.”
윤재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혜진은 다시 커다랗고 묵직한 잔을 꺼내 아까보다 조금 더 천천히 라이 위스키를 따르고 아마로와 앙고스투라 비터스, 오렌지 비터스를 섞었다. 그리고 이번엔 제대로 빨간 체리를 올렸다.
“칵테일 나왔습니다.”
역시나 말없이 윤재는 잔을 움켜쥐고 블랙 맨해튼을 한 모금 넘겼다. 눈가가 찌푸러지는 듯, 입가가 일그러지는 듯 작은 일렁임이 얼굴에 일었지만 혜진은 윤재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혜진 역시 잔을 들어 블랙 맨해튼을 한 모금씩 목으로 넘겼다. 지긋이 윤재를 응시하면서.
윤재의 코끝이 찡그려졌다. 조금 전까지 집에서 아내와 다투며 오갔던 단어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비난의 화살과 앙칼진 목소리에 견디지 못하고 그는 집을 박차고 나와 여기 앉았다. 윤재와 그의 아내 정아는 5년 차 신혼부부였다. 둘 사이에는 곧 돌이 되는 아들이 있었다. 그저 바라만 봐도 절로 함박웃음을 짓게 하는 윤재를 똑 닮은 아들이었다. 그런 예쁜 아이를 사이에 두고 오늘 윤재와 정아는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불꽃들을 쏟아냈다. 마치 용접하는 장면을 연상시킬 정도로 수없이 많은 불꽃이 튀었다. 멈추려 해도 쉽사리 잦아들지 않았다. 어디서부터가 문제였을까. 윤재는 도통 짚어낼 수가 없었다.
“어떠세요? 입맛에 좀 맞으실까요?”
“아.. 예.. 괜찮네요.”
혜진이 보기에 윤재는 말수가 많은 타입은 아니었다. 살짝 경상도 억양도 묻어있었다.
“천천히 음악도 시간도 즐기세요.”혜진이 부드럽게 웃으며 시선을 돌려 테이블을 닦고 음반을 바꿔 올리고 안주 그릇을 채웠다. 윤재는 허공을 응시하며 멍한 듯 말없이 한참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