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혹시 소맥 되나요?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저희 Bar에 앉아도 될까요?”
“네, 그럼요. 편히 앉으세요.”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남녀 일행이 Bar 테이블에 나란히 앉았다.
정우와 은하는 은행 입사 동기였다. 8년 전 함께 신입사원 연수를 받았고 각자 서로 다른 지점에 배치받아 몇 년간 실무를 익혔다. 인연이 깊었는지 3년 전부터는 같은 부서에서 근무를 했다. 은행 안에서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외환파생상품을 다루는 부서였다. 먼저 전입했던 건 은하였다. 정우는 은하보다 뒤늦게 부서에 전입했지만 오자마자 은하보다 막중한 책임의 데스크를 맡았다. 입사 동기인 정우가 자신보다 세 살 많다는 이유만으로, 은하는 그가 조금 더 무게 있는 책임을 맡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면서도, 마음 한편엔 은근한 불만이 차올랐다. 의지와 견제를 동시에 하는 존재로 함께 일하던 중 정우가 몸값을 배로 올려 외국계 은행으로 이직한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오빠 정말 대단하다. 신입사원 연수원에서도 늘 공부만 하더니. 난 오빠가 잘 될 줄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에이, 민망하다, 야. 사실 프라이싱 경력이나 거래 경험은 네가 더 훌륭하지 뭐. 나야 포장을 잘한 거고. 어쨌든 축하해 줘서 너무 고마워.”
“정말 부럽다, 거긴 연봉도 거의 두 배라며.”
“월급쟁이 은행원이 여기나 거기나 지 뭐. 오늘 비싼 거 많이 먹어. 내가 사는 거니까.”
약간의 거들먹거림이 느껴졌지만 오늘 자리는 어찌 되었건 축하를 위한 자리였다. 정우는 익숙한 듯 네그로니를 주문했다. 은하는 칵테일 리스트를 찬찬히 읽으며 조금 뜸을 들이다 버진 피나 콜라다를 주문했다.
“안주도 가볍게 하나 시키자. 사장님 저희 스페셜플래터도 하나 주세요.”
혜진은 붉은 네그로니 잔을 부드럽게 돌려 정우 앞으로 내놓았다. 은하에게는 코코넛 향이 달콤하게 퍼지는 버진 피나 콜라다를 마치 작은 선물처럼 내밀었다. 좀 전보다 훨씬 커다란 파란색 도톰한 접시를 꺼냈다. 치즈와 크래커는 물론이고 견과류와 마른안주까지 풍성하게 담았다. 짭조름한 올리브가 먹음직스럽게 올라갔고 샤인머스캣은 입안에서 터지는 달콤함을 약속하듯 놓였다. 정우가 웃으며 술잔을 들자, 은하는 잠시 시선을 떨군 채 손가락으로 잔 가장자리를 만졌다. 축하하지만, 씁쓸한 감정이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혜진은 잠시 지금 흐르는 음악이 눈앞에 두 남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발매되었단 사실을 떠올렸다. 음반을 바꿔야 하나 고민하던 중 흘러나오는 “빗속에서”를 듣고 은하가 손뼉을 치며 아는 체를 했다. 최근 음악 경연 프로그램에서 젊은 가수들이 리메이크를 한 덕이었다. 다만 혜진에게는 세련된 존박의 목소리보다 젊은 이문세의 음색이 개구쟁이 같은 음색이 더 구슬프게 들릴 뿐이었다.
오늘따라 오레오는 처음 온 손님에게 푹 빠져 정우와 은하 곁엔 얼씬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달잔에 처음 온 남자 손님은 “달잔”의 공기와 분위기를 마시듯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손님과 오레오의 오뎅꼬치 장난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정우와 은하는 8년의 추억을 헤집으며 서로의 기억과 감정의 조각들을 퍼즐처럼 맞추고 있었다.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듯.
연수원에서 유독 오랫동안 샤워를 하며 화장실을 점령하는 룸메이트를 만났던 이야기, 그 룸메이트가 바로 옆 부서 조 과장이라며 둘은 함께 키득였다. 입사 이후 줄 곳 모든 사내 시험에서 1등 만을 놓치지 않는다는 동기의 이야기도 나왔다. 그 동기는 그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지점 경력이 없어 뒷말이 나왔다. 그러다 정우와 은하는 서로 마주 보며 씁쓸한 이름을 떠올렸다. 수진이었다.
“작년 여름은 진짜 여러 가지로 힘들었어”
“그러게. 내가 그날 운구했잖아. 아직도 그날 손끝에 무게감이 너무 생생해.”
정우는 작년 수진의 장례식에서 그녀의 관을 들었다.
“에잇 좋은 날인데, 우리 좋은 이야기만 하자.”
정우는 기지개를 켜듯 어깨를 돌리며 화제를 감찰에 고발당해 잘린 전임 부장이야기로 돌렸다. 직원들 앞에서 그렇게 거들먹거리더니 마지막이 꼴사나웠다며. 정우와 은하는 다시 키득거리고 있었지만 혜진은 은하의 표정에서 갈증 같은 답답함을 읽었다. 정우는 되새김질하듯 탐욕스럽게 크래커와 치즈를 입안에 넣었다. 진한 네그로니를 연거푸 두 잔이나 마신 정우를 바라보며 은하는 결연히 첫 잔만 홀짝거렸다. 조용히 혜진이 물었다.
“신청곡 있으실까요? 가지고 있는 음반 중에 있으면 LP로 틀어드려요.”
머릿속에 뱅글거리는 제목을 떠올리려 미간을 찌푸리는 정우를 막아서며 은하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이제 그만 일어나려고요.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못내 입맛을 다시며 아쉬운 표정의 정우가 새로운 회사의 법인 카드를 꺼내 계산을 했다. 정우가
내민 카드의 금빛 두줄이 유난히 번쩍였다. 은하의 눈동자에 바닥을 향했다. 그 순간 혜진은 프리
지아 한송이 가지를 나가는 은하의 손에 건넸다. 싱긋 웃으면서.
그 둘이 나가고 혜진은 프리지어 다발을 다듬어 제법 묵직해 보이는 꽃병에 꽂았다. 오레오가 궁
금한 듯 다가와 코를 킁킁거렸다. 10분이나 지났을까. “달잔”의 문이 다시 열렸다. 은하였다. 혼자
돌아온 듯했다. 동그란 눈으로 조심히 은하는 물었다.
“사장님, 혹시 여기서 소맥도 마실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