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잔 두번째 이야기 3

2-3 봄날의 프리지어

by 이세

“사장님, 혹시 여기서 소맥도 마실 수 있을까요?”


소맥이란 단어에 벽을 응시하던 외로운 손님이 호기심에 살짝 눈을 치켜 뜨고 입구 쪽을 바라봤다. 혜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여기 앉으세요.”


그새 혜진이 테이블을 말끔히 치워 놓은 터였다.


“메뉴판엔 없지만 제가 종종 마시려고 특별히 살얼음지게 얼려 놔요. 오늘은 그게 필요하실 것 같네요”


은하는 두 손을 모아 가슴에 얹고 두 눈을 꼭 감았다. 그 사이 혜진은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긴 유리잔 바닥에 깔리듯 따른 후 살얼음이 낀 맥주를 부었다. 차가운 얼음 사이로 은하의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수진은 은하와 정우가 근무하던 부서에서 일하던 계약직 직원이었다. 은하는 수진과 그리 살갑게 친하게 지내진 못했다. 접점이 없어서 라고 은하는 생각했다. 수진은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았다. 은하는 그런 수진이 당돌하다 느꼈다. 아마도 정우에게는 수진이 좀 떽떽거리긴 해도 자신의 일을 잘 도와주는 보조자 정도였을 것이다. 매일 같이 수천억의 돈이 오가는 곳에서는 모두가 그저 부품이었다.


그날도, 그저 ‘수진이 안보이네, 좀 늦는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던 날이었다. 한 낮이 되도록 수진이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불길한 전화벨이 올렸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네? 수진이가? 수진이가? 다 깨졌다구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대체?”


찢어지듯 날카로운 소리에 순간 정적이 이는 듯했지만 다시금 공기는 차분히 가라앉고 다들 무심하게 책상 위에 각자의 모니터들만 응시했다. 다들 초를 쪼개 돈을 사고 팔고 있었다. 은하 역시 자신의 화면에 집중하며 달러를 사고 팔면서 몇 백만원이라도 수익을 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전화를 받은 직원이 울면서 돌아왔다.


“수진이가 죽었어요. 전화가 왔어요 경찰서에요. 수진이가…수진이가….”


일 순간 넓은 딜링룸 안의 공간이 잠시 멈췄다. 약 5초 정도. 그리고는 곧 다시 모두가 약속한 듯 모두의 초점은 모니터로 고정되었다. 은하 옆에 앉은 다른 여자 대리아이는 그 순간조차 눈알에 뻘건 실핏줄이 터진 채 달러를 사고 파느라 정신이 없었다. 은하는 왠지 모를 역겨움을 느끼며 들고 있던 포지션을 다 던져버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참을 울었다.


혜진이 내민 소맥을 시원하게 들이킨 후 은하는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니라는 듯 물었다.


“사람의 무게가 얼마나 될까요?”


“글쎄요. 스스로의 몸무게 만큼이려나?”


혜진은 몸을 놀려 선반에서 잘 말린 바삭한 멸치를 꺼내 은하 앞에 놓았다. 은하는 바스라 질 듯 마르고 작은 그 멸치를 만지기만 할 뿐 차마 입안에 넣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똑부러지게 자기 주장을 잘 말하는 친구였는데 말이죠.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수진은 단 한마디의 말도 남기지 않고 그렇게 가버렸다. 장례식에서 수진의 모친은 박스 하나에 정리된 딸의 유품을 받아 들더니 월급 통장은 어딨느냐며 성을 내었다. 회사 윗선 에서는 행여나 지난 달 정규직 전환 시험에서 누락 된 것이 입에 오르락 될까 조심했다. 은하는 그녀의 발인에서 정우가 힘겹게 관을 드는 것을 보며 그 작은 몸이 어찌 저리 무거웠던 걸까 생각했다.

미처 혜진이 바꾸지 못한 턴테이블에서 이문세의 ‘휘파람’이 연주되고 있었다. 혜진은 은하의 손등을 가만히 쥐어 주었다. 지긋이 감은 은하의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혔다.

“딱 한잔만 더 줄께요. 아까보다 더 스페셜하게, 더 맛있게!. 기다려봐요.”

혜진은 이번엔 조금 작은 유리잔을 찾아 소주를 다시 조금 따르고 아까보다 더 풍성한 얼음이 맺힌 맥주를 그득히 따라 내어 은하 앞에 내려놓았다.

“고마워요. 낼 출근해야 하니까.”

은하의 눈가는 살짝 반짝였지만 두번 째 잔을 받아 든 은하의 입술은 미소 짓고 있었다. 왜인지 오늘밤은 이렇게 조금만 더 있어도 괜찮을 꺼 같단 생각이 들었다. 혜진은 꽃병에 꽂은 프리지아를 다시 꺼내 물기를 털었다. 그리고 접어둔 신문지를 다시 펼쳐서 프리지아 다발을 돌돌 말았다.


“봄냄새가 좋죠? 자 가져가요. 오늘 선물이에요”


혜진의 손끝에서 은하의 손끝으로 노란 반짝임이 옮겨갔다. 깊어가는 밤 달잔의 빛이 더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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