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수

by 신기루

좋은 영화는 물음표를 계속 머리에 떠올리며 보는 것이다. 나름의 얼개도 짜 보고 결론도 떠올리며 추리를 해 나가는 것이다. 중간중간 예측하지 못 한 사건들이 나오면 다시 얼개를 짜 가면서 추리하는 것은 뇌에 즐거움을 준다. 그러다가 전혀 다른 사건들로 이어지면


'오- 작가 대단하다, 감독 대단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하면서 보는 즐거움이 크다. 그런데


'봐, 내 말이 맞잖아. 역시.'


이렇게 되면 결과를 맞춰서 기분이 좋은 듯 하지만 싱겁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 별 이야기 있겠어? 작가도 내 상상력을 벗어나지 못했군.'


이렇게 자만하면서 곧 잊어버린다.


그런데 어떤 영화는 두고두고 반복적으로 머릿속에서 그려질 때가 많다.

희수, 보통 영화를 볼 때 짧은 시놉시스를 읽고 고른다. 그래서 대충은 흐름을 알고 본다.

희수는 교통사고로 아이가 죽고... 여기까지만 읽고 더 이상 읽지 않았다. 너무 스토리를 많이 알면 흥미가 떨어지니까.

그런데 '전소민'배우가 나온다고 해서 한번 보자고 켰다. 교통사고라고 하면 차와 차가 부딪혀서 중상으로 죽게 되는데 이 영화에서 아이는 좀 다른 각도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희수의 아이는 버츄얼 게임을 하고 있다. 기르는 강아지가 죽었는데 그 강아지와 가상현실에서 만나서 노는 게임이다.

그래서 나름 상상을 해 보았다. 죽은 아이를 가상 게임에서 만날 것이다. 그런데 결국은 희수도 가상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죽는다. 요런 상상을 하면서 봤는데 나의 상상을 완전 벗어나게 작가가 꾸몄다. 그래서 만족스럽다. 빗나간 결말이 되었으니.

만약 나의 상상대로 끝났다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 되는 걸까.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많아지면 그만큼 위험해진다는 의미일까?

만약 우리 엄마가 돌아가시면 가상현실 속에서 만나서 웃고 밥 먹고 얘기하며 놀면 그 순간 행복할 것 같다.

최근 셀럽들이 홀로그램으로 노래를 부른다. 그들을 더 가까이에서 만나고 노래를 듣는다면 좋긴 하지만 진짜 실체를 보는 만큼 감동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접속'이란 영화가 나온 때가 90년대. 온라인을 깨고 굳이 오프라인으로 만남을 가지려는 인간들. 그때만 해도 접속해서 접촉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에 들어오면서 대면이 두려워지고 인간을 기피하는 지금. 섬처럼 뚝뚝 떨어져서 각자 놀다가 가끔 랜선으로 만나는 시대. 가까이에서 만질 수 있는 가족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만질 수 있는,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대상. 사람 혹은 동물, 식물 등.

그런데 버츄얼 게임 안에서는 만진다는 착각. 착각이지만 진짜 같아서 속으면서도 즐거움을 느끼는 것. 속는 재미라는 말도 있다. 마술이 그렇다. 가짜인데 진짜처럼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들. 짝퉁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인간들을 속인다. 영화는 완벽한 허구이지만 사람들은 좋아한다.

그렇지만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면 현실로 나온다. 버츄얼 게임을 하면서 현실과 가상을 오가면서 적절한 재미를 느끼면 다행이다. 또 하나의 재미거리가 되는 수단이라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동전 양면처럼 착한 면과 악한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게임은 즐거운 것이지만 게임중독이란 말처럼 현실과는 거리를 두고 게임 속에 빠져 살면서 인생을 허비하는 경우도 많다. 단 것만 먹으면 좋으련만 이가 썩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면 나중엔 틀니를 해야 한다.

모든 것에는 이면, 즉 뒷면이 있다는 것을. 나쁜 것에 더 취하고 빨려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긍정적인 것만 가지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조절력을 가끔 상실하는 나부터도 자신 없으면 시작을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하지만 유혹에 약하고 호기심이 많아서 한 번은 해 볼 것 같다. 이후 그만두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빠져나오는데 오래 걸리는 사람도 있고 금방 싫증 내고 나오는 사람도 있다. 그냥 가는 거다. 인생 뭐 없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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