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길치 펭귄의 홍콩 첫날밤

펭귄 표류기 : 홍콩편 EP2

by 펭글

공항버스가 완차이 지구에 도착했어요. 낯선 거리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어디선가 국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어요. 남극에선 맡아본 적 없는 향이었죠-! 후각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 곳에서 발견한 작은 식당에서 고른 건 평범한 닭고기 국수였어요. 물고기가 아니라는 게 조금 아쉽긴 했지만 낯선 도시에서의 첫 끼라 그런지 반짝이는 기분이었지요.


주문을 하고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직원이 누군가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저를 안내했어요. 처음엔 실수인가, 내가 펭귄이라 그런가 걱정했지만, 곧 홍콩의 '합석 문화'라는 걸 깨달았죠. 생각해보니 남극에선 친구들과 항상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과 밥을 먹는 건 어색한 일이 되어있었네요. 맞은편의 할머니는 무심히 국수를 먹을 뿐이었고, 앞 자리에 펭귄이 앉아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어요. 저도 조용히 젓가락을 들었어요. 남극에선 젓가락이 없었는데,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서 국수도 잘 먹는답니다-!



거리를 한참 더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로스터리 카페. 문을 열자 진한 커피 향이 훅 끼쳐왔어요. 처음엔 이게 뭔가 했는데, 한 모금 마시자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이었어요-! 호기심에 바리스타에게 물어보니, 와인처럼 숙성된 향을 내기 위해 특별한 로스팅 방식을 사용한다고 하더라고요. 예쁜 잔 위에 정성스레 그려진 하트 모양의 라떼아트를 보며 문득 생각했어요. 내일 다시 와서 똑같은 커피를 마셔도 오늘과 같은 감동은 없겠지만, 이 순간이 너무나 즐겁다. 그게 바로 여행이 주는 특별함인 것 같아요. 낯선 장소에서의 '처음'이 주는 설렘이 곧 여행의 묘미 아닐까요-?


옆자리에는 영국인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고작 7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디카페인 라떼를 주문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아버지는 아들에게 타로카드 읽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서로 다른 문화가 자연스럽게 섞여드는 이 도시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어요.


빅토리아 파크로 가보니 설날 마켓이 한창이었어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취두부 냄새가 확 끼쳐왔는데... 으악-!! 생선 비린내보다 열 배는 더 강렬했달까요-? 대학 시절 교양 수업에서 봤던 풍경이 눈앞에 있었어요. 빼곡한 노점상들 사이로 인파가 끊임없이 흘러들어갔죠. 10분을 서성이다 발길을 돌렸지만 지금도 선명한 기억이랍니다.

IMG_4210.JPEG


바람이 쌀쌀해져서 외투를 사볼까 코즈웨이 베이의 룰루레몬(이름이 귀엽지 않나요-? 룰루-!)에 들렀어요. 하지만 생각보다 비싼 가격표를 보고 화들짝 놀라 발길을 돌렸답니다. 남극보다 따뜻하니 일단 버텨보기로 했어요-! 대신 쇼핑몰 구경을 했는데, 여성 의류 매장마다 한국 아이돌 음악이 흘러나오고 마뗑킴 가방이 군데군데 보이더라고요.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는 이층 트램 창가에 기대어 앉았어요.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하루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만 같았죠. 길을 많이 헤맸기에 첫날부터 꽤 많이 걸었어요, 무려 32,000걸음이었죠-!! 발은 퉁퉁 부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가벼웠답니다. 방향치+길치 펭귄인 제가, 홍콩의 복잡한 거리도 이렇게 종일 돌아다닐 수 있다니-. 남극, 한국, 그리고 이제는 홍콩까지... 펭귄도 어디서든 잘 적응할 수 있다는 걸 깨달으니 자신감이 막 생기며 남은 일정이 더 기대되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여행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낯선 것들과 마주치고, 예상치 못한 순간들을 마주하고, 그러다 문득 나를 돌아보게 되는 것. 흐릿했던 마음이 아주 조금씩 선명해지는 기분이에요. 내일은 또 어떤 홍콩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기대하는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 지도를 켜보았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녹아내리는 회사를 떠나 공항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