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무라카미 하루키
전반적인 감상평
쉬운 문장으로 적힌 난해한 이야기. 온갖 종류의 은유와 알레고리가 소설 전반에 산재해 있다. 게다가 반전이라고 해야 할지, 의미 불명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결말까지. <잠>을 읽고 해설을 찾아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 자체는 비교적 명확하다. 의미 없이 그저 소모되기만 하는 삶은 언젠가는 사람을 무너뜨린다는 것.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를 존엄하고 고유한 존재로 정의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소모되는 삶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개인이 느끼는 개인에 대한 고유함, 혹은 존엄함이라는 것은 시간에 따라 변하는 속성이라 ‘내가 삶을 누려 마땅하다’는 감각을 상기하게 해 줄 지속적인 외부적, 혹은 내부적 자극이 있어야 하는데, 소모되기만 하는 삶 속에서 그런 자극들을 충분히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그래서 불면을 얻었고, 꼭 그동안 희생된 무언가를 상쇄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불면을 삶의 확장으로 여기려 했고, 그랬음에도 그 방법이 소극적이었다는 한계에 부딪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모든 순간을 온전히 나로 살아갈 수는 없다. 그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삶이 ‘살 만하다’는 감각, 그것을 누리게 해 줄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고 탐구해야 한다.
1.
중학교 시절 나의 문학 세계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타우누스 시리즈와 퇴마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참으로 일관성 없는 세계다. 어쩌겠는가. 그때는 어려서 좋아하고 싶은 걸 발견하면 아무것도 재거나 따지지 않고 무작정 좋아했다. 그리고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에도 거침이 없었다.) 학교 도서관에는 하루키의 소설이 꽤 많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그중 대부분이 금서였다. 사유는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는 것. 그러나 나는 도서부 소속이었고, 그 지위를 마음껏 이용해 금서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다.
처음 읽었던 책은 아마 <댄스 댄스 댄스>일 것이다. 확실히 열 몇 살 꼬마가 읽기에 선정적이기는 했지만, 하루키 특유의 ‘글 맛’이 좋았다. 말에도 맛이 있고, 글에도 맛이 있다. 하루키 소설의 맛은 쉽게 읽히는데, 여운이 오래 남는다는 것에 있었다. <잠> 역시 중학교 시절 읽었고, 그리고 아주 재미있어 했었다. 그랬었다.
대놓고 과거형으로 쓰려니 이유 모를 죄책감이 든다. 이상한 일이다. 한때 그렇게 좋아했던 작가의 책인데, 이제는 그렇게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른 좋아하는 작가들을 많이 찾게 되어서 그런 것일까. 대략 10년쯤만에 다시 읽은 잠은 여전히 쉽게 읽혔지만 그다지 여운이 많이 남지는 않았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졸음 비슷한 것이 찾아온다. 나는 잠의 테두리쯤을 손끝에 아주 조금 느낀다. 하지만 얇은 벽으로 나누어진 바로 옆방에서 내 의식은 생생하게 깨어 나를 지그시 지켜본다. 내 육체는 흐느적흐느적 옅은 어둠 속을 헤매며 계속 나 자신의 의식의 시선과 숨결을 바로 옆에서 감지한다. 나는 자려고 하는 육체이고 동시에 깨어나려고 하는 의식이었다.
- 10p.
2.
그렇다고 해서 하루키 작품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폄하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하루키가 훌륭한 작가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의 정교한 묘사나 문장 몇은 아직도 나로 하여금 감탄을 내뱉게 한다.
그저 취향이라는 것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간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것이 내 생활이다. 즉 잠을 못 자게 되기 전까지의 내 생활이다. 하루하루가 거의 똑같은 일의 되풀이였다. 나는 간단하게 일기 같은 것을 쓰고 있지만 이삼 일 깜빡 잊고 쓰지 않으면 어느 날이 어느 날인지 벌써 구별하지 못한다. 어제와 그제가 뒤바뀌어도 거기에는 아무 지장도 없다. 이게 대체 무슨 인생인가, 때때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허망함을 느낀다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냥 단순히 깜짝 놀랄 뿐이다. 어제와 그제의 구별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런 인생에 나 자신이 끼워 맞춰져버렸다는 사실에. 나 자신이 찍은 발자취가 그것을 인정할 틈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바람에 날려가버린다는 사실에.
- 26p.
3.
하루키의 문장은 쉽다. 그것이 함의하는 바가 얼마나 복잡한 것인지는 차치하고, 글을 적힌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다. 어려운 문장이 주는 매력은 성취감이지만, 쉬운 문장이 주는 매력은 쾌감이다. 한 문단을 쑥 읽어내려갈 때, 걸리는 부분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 그럴 때는 짜릿한 느낌까지 든다.
그러나 읽기 쉽다는 것이 언제나 쓰기 쉽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술의 완벽한 호응, 아주 적절한 곳에서만 쓰이는 수식어구, 어렵지 않으면서도 정확한 의미를 가리키는 단어. 이중 어느 하나라도 충족하지 못하면 그것은 쉬운 글이 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의 글은 언제나 탁월하다. 그리고 독자를 위한 글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인가. 나는 경향적으로 소비되고, 그 쏠림을 조정하기 위해 잠을 잔다. 그것이 매일매일 반복된다. 아침이면 눈을 뜨고 밤이 되면 잠을 잔다. 그 반복의 끝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뭔가 있기는 한 것일까. 아니, 아무것도 없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분명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경향과 그게 대한 조정이 내 몸속에서 한없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잠 따위는 필요 없어, 라고 나는 생각했다. 잠을 못 자는 것 때문에 내가 ‘존재 기반’을 잃는다고 해도, 설령 미쳐버린다고 해도, 그래도 좋아, 상관없어.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경향적으로 소비되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경향적인 소비가 몰고 온 쏠림 현상을 바로잡기 위해 정기적으로 잠이 찾아와 내 하루의 삼분의 일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딴 것은 필요 없다. 나에게는 나만의 방식이 있다. 나는 책을 읽을 것이다. 나는 잠을 자지 않을 것이다.
- 70p.
4.
그러나 ‘하루키가 말하고자 하는 것’, 즉, 그의 문장이나 작품이 품고 있는 그 총체적인 주제나 내용이 쉬운가 하면 그것도 또 아니다. 하루키의 작품의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하면 늘상 따라붙는 단어는 이것이다. ‘해석.’ 그리고 그의 작품을 평가할 때도 비슷한 단어가 꼭 따라붙는다. ‘난해함.’
<잠>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모호한 것들 투성이다. ‘나’는 왜 갑자기 이런 이상한 불면을 겪게 되는지. ‘나’의 꿈에 나타난 그 노인은 누구인지. ‘나’가 마지막에 마주한 괴한들은 누구인지. 그래서 이후에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이 책에서는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뚜렷한 정답을 하나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 모든 것이 비유이고 알레고리이다.
다만 이 상황의 난해함 속에서도 비교적 ‘나’의 심리는 직관적으로 묘사되는데, 작품의 초반을 제외하고는 ‘나’는 이 이상한 불면에 대해 호의적이다. 생존에 필수적인 잠을 빼앗아갔지만, 그 대신 ‘나’가 온전히 자신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통 주인공의 가치관이 주제를 대변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작품의 주제는 정체성 없이 소모되는 삶에 대한 비판이라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런 건 나에게는 이미 어지 되건 상관없는 일이었다. 만일 어떤 덧셈 뺄셈 때문에 내가 일찍 죽어야 한다고 해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그 추론은 추론대로 자기 갈 길을 멋대로 가게 내버려두면 된다. 적어도 지금 나는 나 자신의 인생을 확장하고 있다. 이건 매우 멋진 일이다. 거기에는 나 자신이 지금 이곳에 살아 있다는 실감이 있다. 나는 소비되고 있지 않다. 적어도 소비되지 않는 부분의 내가 이곳에 존재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 73p.
‘고유함’이라는 속성은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서만 부여될 수 있다. ‘존엄’ 역시 누군가에게 빌거나 얻어와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내가 나 스스로에게 제공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존엄 그 자체든, 존엄해질 수 있는 시간이든.
5.
그러나 그렇다면, 마지막에 나타나는 괴한들은 어떤 이유로 새로운 각성을 맞아 ‘바람직해진 나’를 공격하려 하는 것인가. 정말로 불면으로 인한 각성이 바람직하다면, 하루키는 왜 ‘나’에게 비극적 결말을 선사하려 하는가?
‘주체적인 삶을 향한 각성’이 사실 바람직하지 않다, 는 주장을 하루키가 하려 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그 각성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비극이 닥친 것 아닌가 개인적으로 추측해 본다.
‘나’의 불면은, ‘나’ 외에는 아무에게도 인지되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의 각성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은밀하게 즐길 뿐이다. 즉, 아주 소극적인 각성이다.
실제로 괴한들을 마주하는 시점에, ‘나’는 집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여전히 좁은 자동차 안에는 갇혀 있는 상태로 묘사된다. ‘각성’은 했지만, 스스로의 정체성을 갈구하고, 또한 무기력하고 소비되는 삶에 저항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려 하지는 못한 것이다.
6.
‘나’가 맞이한 결말은 사실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작품 중반부에도 끔찍한 결말에 대한 암시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나’가 희생한 것이, 생존에 필수적인 ‘잠’—게다가 이 소설 내에서는 ‘경향’을 중화한다는 기능까지 부여받은—이기 때문이다.
‘나’는 불면을 통한 각성을, 불면의 시간 내에서만 누릴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인 차원으로 ‘확장’했어야 했다. 남편과 자식 앞에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척을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원하는 인생을 쟁취하기 위한 선언을 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나’는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개인적인 추론에 의하면 말이다. 하루키가 실제로 이런 의도였는지는 모르겠다.)
� <의문들, 그리고 아주 개인적인 추론>
Q. 이토록 이상한 불면을 야기하기에는, ‘나’가 꾼 꿈이 그렇게 공포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아주 평탄한 인생을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공포 자극에도 취약했던 것이고, 작은 위협에도 극렬하게 반응한 것이 아닐까.
Q. 꿈에서 노인이 ‘나’의 발에 물을 부은 것은 어떤 의미인가.
보통 성서에서 발에 향유를 붓는 묘사가 긍정적인 표지로 자주 사용되지 않나? (잘은 모른다. 불성실한 크리스천이라.) 비록 노인의 외관은 공포스러웠을지라도, 노인의 행동 자체는 ‘나’에 대한 일종의 비틀린 축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로 ‘나’는 소비되지 않는 삶에 대해 각성했으니.
Q. ‘나’의 남편에 대한 감상이 사랑(비슷한 것)에서 혐오로 너무 급작스럽게 변한다.
원래 깨달음이라는 것은 순간을 통해 찾아오는 법이다. 그리고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한 정(情)도 가속도의 법칙(?)에 의해 순식간에 떨어져 되돌릴 수 없게 되는 법이다.
Q. 작중 등장하는 <안나 카레리나>는 어떤 의미인가?
정체성 혹은 주체성과 관련이 있는 작품일 것 같기는 한데, 아직 안 읽어봐서 모르겠다. 읽고 다시 생각해 볼 예정이다.
7.
‘나’가 마주하게 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고유한 개인’으로 살아남기에는 너무나 힘든 세상이다. (그게 쉬운 세상이 언제는 있었겠냐마는.) 학창시절에는 못다한 꿈들을 실현할 수 있는 시간인 방학이라도 있었지,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정말 매일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다. ‘정말 이대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고?’ 하는 자괴감 섞인 의문은 우울에 자주 기여한다.
‘나’도 사실은 우울증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나’를 상담해 본 것은 아니라서 진단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전의 생활이 만족스러웠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야지만 고통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한 번 얻은 깨달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 번 각성을 한 이상, 아무렇지 않게 깨달음을 포기하고 이전의 지루한 삶, 남편과 아이를 위해 맞추어져 있던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전의 삶이 얼마나 무기력했던 것인지 깨달은 ‘나’는 이제 남편과 아이를 혐오스럽다고 느끼기까지 한다. ‘나’가 소설 속 인물이니 극적 세계관의 문법에 맞게 ‘적극적 투쟁을 해야 한다!’고 하기는 했지만, 만약 ‘나’가 내 실제 지인이었다면 나는 ‘나’에게 주저 없이 상담이나 진료를 권했을 것이다.
잠을 자는 대신 그 시간을 온전 나만을 위한 시간으로 쓸 수 있다면. 정말 황홀한 가정이기는 하다. 하루의 삼분의 일, 인생으로 치면 대략 30년이다. (우리는 100세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30년을 잠으로 흘려보내는 대신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면······. 나는 10년은 책을 더 읽고 10년은 산책을 하고 10년은 여행을 하겠다.
8.
중학교 시절 이 책을 봤을 때, 표지가 무섭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은 무섭지는 않고, 작품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표지뿐만 아니라 작품 내에 수록되어 있는 일러스트들 역시 조금 기괴하기는 하지만 볼 만하다. 어떤 심상은 글보다는 그림으로 더 명확하게 드러나기도 하니까.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평가도 있는데, 소비(희생)되는 여성의 삶을 그렸다는 점에서 딱히 틀린 평가는 아닌 것 같다. 다만 나는 ‘나’를 여성이 아니라 개인으로 읽었고, 개인으로 해석했다
10년이 흘러 읽은 책은 10년 전과는 상당히 다른 감상들을 전해주었다. 10년 후, 서른 다섯 살의 나는 이 책을 또 다르게 읽을 것이다. 그때는 나의 ‘고유한 삶’이 무엇인지 찾은 이후이기를 바란다. 그럼 이 책을 읽고 ‘나’에게 지금보다 그럴 듯한 조언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투쟁했어야지!’하는 것 말고 말이다.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