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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 황경신/김원

by SAndCac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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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인 감상평

동화 같은 글이다. 티 없이 맑은 구슬이나 어린아이를 볼 때 느껴지는 아릿한 애틋함 같은 것들을 글을 읽는 내내 품게 한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한동안 무엇이든 한없이 소중히 여겨주고 싶게 만든다. 작년에 읽었을 때는 이렇게 좋은 글인지 몰랐다. 조금 유치한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일 년 사이에 내게 무슨 변화가 생긴 건지. 조금 더 낭만적이어진 것일 수도, 조금 더 어리광을 부리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어느 방향이든, 이런 글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마음에 든다. 좋은 문장을 골라 필사를 해보려고 해도, 통으로 베끼지 않고서는 ‘유별나게 사랑스러운 문장’이라는 것을 뽑기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좋은 의미로. 하나를 뽑으려고 하면 다른 모든 다른 문장들이 ‘정말 날 포기할 셈이야?’ 하며 고개를 들고 나를 유혹하기 때문이다. 나도 언젠가는 아주 특별한 맛의 레모네이드를 만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순간에 이 책을 떠올리고, 그런 특별한 레모네이드를 만났다는 사실에 행복해할 수 있기를.


1.

"나는 동화를 쓰고 싶었고 연극을 하고 싶었고 사막에서 실종되고 싶었다." - 서문 중에서

이 얼마나 낭만적인 꿈인가. 사막은 망망대해보다 더 고독하다. 낮에는 태양, 밤에는 별. 그 외에는 친구 삼을 만한 것이 없다. 그런 곳에서 실종되고 싶다는 꿈을 꾸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잊혀지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신비와 미지의 영역으로 던져 넣음으로서 세상에 영원히 기억되고 싶은 것일까.

이 책의 뒷표지 날개에는 <가수 김창완이 말하는 두사람 이야기>라는 짧은 코너가 있다. 김창완은 황경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위의 사람은 사라졌기 때문에 찾는 것이 아닙니다. 틀림없이 있는데도 어디 있는지 몰라 찾습니다.’

크게 네 파트로 이루어진 이 책은, 사막에서 실종되고 싶다는 꿈을 가진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낭만적이고, 고독하면서, 동시에 반짝반짝 빛난다.

기억들은 더 많은 나이를 먹고 추억이 된다.

그리고 추억들은 하나의 마을을 이루기도 한다.

- 15p. <추억이여 안녕한가>

모든 기억이 시간을 먹고 추억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기억도 묻어두면 화석이 될까요.’ 미완으로 남긴 글에 언젠가 적어두었던 문장이다. 기억, 그리고 추억이라는 것은 그 단어 자체로 쓸쓸한 느낌이다. 과거는 언제나 과거일 뿐, 다시 마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들은 적어도 화석만큼 건조하고 버석하지는 않다. 추억이 될 기억과 화석이 될 기억. 한때는 잊혔더라도 문을 열고 들어가면 따뜻하게, 혹은 따뜻하지 않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맞이해 줄 추억과, 그저 땅속에 묻혀 본체는 썩어 없어지고 그 흔적만 흉터처럼 남기기를 기약하는 어떤 치명적인 상처들. 스스로를 사료로 제공하는 취미는 없지만, 상처받지 않는 영혼은 없다는 랭보의 말이 늘 가슴 속에 따끔거린다. 상처받지 않는 것은 영혼이 아니라면, 화석으로 묻어두고 싶은 기억이 없는 것도 영혼이 아니다. 추억으로 된 마을과 황폐하기만 한 유적을 모두 가슴에 묻고, 영혼을 가진 존재들은 살아간다.

오래 전에 나는 그 우물 속에 작은 지갑을 빠뜨린 적이 있다. 동그란 천으로 만들어진 그 지갑에는 빨간 사과 하나가 수놓아져 있었다. 나는 지갑을 빠뜨렸지만, 그리고 아무리 울어도 우물로부터 다시 돌려받을 수 없었지만, 그 지갑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우물은 세상에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주었다. 우물은 내게 가르쳤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버리라고. 네가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집착하지 말라고. 나는 내가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을 모두 깊은 우물 속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 55p. <소유, 혹은 깊은 우물>

2.

너무 좋아해서 아껴 먹는 간식이 있는가? 나는 스위스의 어느 수제 초콜릿 브랜드의 간식을 아주 사랑한다. 크기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 가격은 아주 악랄하다. 그래서 16구짜리 초콜릿 한 박스를 사 놓고, 몇 달을 아껴 먹고는 했다. (유통기한은 모르겠지만 먹고 탈이 난 적은 없다. 차라리 탈이 났으면 아주 끊었을 텐데!) 못 견디게 힘든 일이 있는 날에만, 스스로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하나씩 집어 먹었다. 어떤 초콜릿을 먹을지를 고르는 그 순간부터 나에게는 달콤한 치료이자 보상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그 초콜릿들이 떠올랐다. 길어야 열 몇 장, 짧으면 한 장짜리 단편들이지만, 읽는 것만으로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짐들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 준다. 그렇다고 이 책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 식의 싸구려 위로를 던진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초콜릿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어린아이를 보면 괜히 미소를 짓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책을 읽고 가뿐해지는 것 역시 같은 이치다. 우울한 날 약 대신 이 책을 한 장 뜯어 먹고 싶다. 내가 책 먹는 여우 아저씨라면, 확실히 그럴 것이다. (사실 아니다. 이 책은 품절 책이라 감히 뜯어 먹을 수 없다.)

슬픔의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생명체는 푸른등돌고래였다. 그는 가장 나이가 많을 뿐만 아니라 가장 지혜로웠고 가장 인내심이 깊었고 가장 훌륭한 유머감각을 지니고 잇었으며 가장 아름다웠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를 여러 개 알고 있었으며, 그것 때문에 다른 이들은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슬픔을 위로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를 좋아했다.

- 116p.

슬픔은 때로 기쁨이 아니라 더 큰 슬픔 앞에서 위로받는다. 그리고 더 큰 슬픔은 자주 작은 슬픔들의 연대로 달래진다. 그것이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 슬픔은 실제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무거워서, 함께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주저앉아 버릴 것이다.

“이것을 보렴. 이것은 사랑의 유리공이란다. 이제 너도 이것을 지닐 나이가 되었구나. 사랑의 유리공은 아주 아름답고 신비롭지. 이것을 지니고 있으면 세상의 빛갈이 이전과 다르게 보이고, 소리는 더욱 아름답게 들린단다. 하지만 아주 조심해야 해. 사소한 부주의에도 쉽게 깨어지거든. 사랑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기쁨의 바다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야. 그 속에는 슬픔이 훨씬 많지. 그래서 슬픔의 바다 속에서 사는 우리들이 그것을 지키고 있는 것이란다. 조심해. 네가 그 유리공을 깨뜨리게 되면, 세상에 사랑 하나가 깨어지는 것이고, 너는 슬픔의 바다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는 거야.”

나는 작고 투명하고 깨어지기 쉬운 유리공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그러자 아득한 현기증이 일었다. 그 후로 꼭 백일 동안, 나는 그땎지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고 상상하지도 못햇던 기묘한 세계 속에 살았다. 그 세계에서 사는 동안, 나는 태어나서 그때까지 흘린 눈물의 꼭 세 배를 흘렸고,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맛보았으며,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질투와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살의와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외로움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졌을 때, 나는 돌고래를 찾아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만 유리공을 깨뜨려버렸다.

- 119-120p.

3.

이 책은 아픔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읽는 사람을 아프게 만들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아프다 못해 공격적이기까지 하다고 느껴지는 책이 있다. 그런 책들 나름의 장점을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그것은 아주 훌륭한 장점이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지 않은 책. 언제든 나를 무지개와 요정의 나라로 데려가 줄 수 있는 책.

사진 작가가 따로 있다. 곳곳에 수록된 서정적인 사진들은 글에 분위기를 더해준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사진 보는 눈이 없는 나로서는 특별한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그래도 사진이 없었더라면 이 책을 읽으며 지금과 같은 감상을 받지는 못했을 거라는 막연한 짐작이 있다. 이 책은 글과 그림과 사진과 작가 소개(본인들이 쓴 것과, 위에서 말한 것처럼 김창완이 쓴 것이 있다.)가 모두 합쳐져 만들어내는, 소위 말하는 총체적 종합예술 같은 것임이 틀림없다. (심지어 노래도 자주 등장하니 말이다.)

4.

거창한 거대 담론을 다루는 것도 아닌데, 충분히 의미 있는 책이라고 여겨진다. ······. 아무래도 책 칭찬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다. 내가 원래 이렇게 칭찬만 하는 사람이 아닌데. 비판할 점을 찾아보고 싶지만 잘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이 책이 정말 ‘완벽해서’라기보다는 지금 이 시점의 ‘나’와 정서가 잘 맞아떨어진 덕일 것이다. (작년의 나는 이 책을 확실히 좀 유치하다고 생각했었다.)

또 언젠가는 이 책이 다시 유치해질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낭만이 있는 삶을 늘 추구하고자 하는 바, 이 책을 일종의 낭만 측정기로 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책을 읽은 후의 감상이 ‘흠, 아주 기분이 좋아지는 책이군’이라면 나는 충분히 낭만적인 것이다. ‘흠, 어린애들 소설이군’이라는 감상이 든다면 그때는 어린왕자를 찾아 여기저기 여행을 다닐 때가 왔다는 뜻이다. 모자를 뒤적이면서 코끼리와 보아뱀도 좀 찾아보고 말이다. 그대 역시 한 번쯤 그대의 낭만을 측정해 보기를. (이 책을 구할 수 있다면 말이다.)

� <특별히 추천하고 싶은 단편>

- 아주 특별한 맛의 레모네이드

- 이 길은 여우가 지나간 길

- 달 위의 은빛 사과

- 아름다운 날들

“왜 레드 제플린만 틀어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존 보냄이 죽은 날이거든요.”

“잠시 후에 또다른 이들이 다시 물었다.

“왜 도어스만 틀어요?”

나는 대답했다.

“짐 모리슨이 죽은 날이거든요.”

그러면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얌전히 돌아갔다. 내 기억에 의하면 존 보냄은 구월에 죽었고 짐 모리슨은 칠월에 죽었다. 레너드 스키너드의 로니 밴 잰트와 스티브 게인즈는 시월에 죽었고, 재니스 조플린도 시월에 죽었다. 어찌되었거나 죽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다.

지금에 와서 내가 칠월이나 구월에 죽은 사람들을 십일월에 죽었다고 우겨도, 그들이 이미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상에는 달라지지 않는 것들이 꽤 많이 있다.

- 164-1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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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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