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방우편기>, 생텍쥐페리.
소재가 소재라 글을 올리며 최근 있었던 참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책의 내용도 감상의 내용도 참사와는 관련이 없지만, 혹 이 글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를 입는다면 글은 바로 삭제하도록 하겠다. 희생자 분들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유가족 분들에게 애도를 보낸다.
사진 속 텍스트가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따로 첨부한다.
전반적인 감상평
생텍쥐페리의 첫 작품인 만큼 미숙하고 불완전한 티가 곳곳에 남아 있다. 게다가 다른 작품들보다 와닿지 않는 현학적이고 철학적인 비유들이 많이 사용된다. 모든 문장, 모든 단어에 의미를 꽉꽉 채워 담으려 했기 때문이라는 해설자의 추측에 공감한다. 내가 알고 있는 생텍쥐페리의 문장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훌륭한 책이다. 특히 인간의 심리에 대한 묘사가 그렇다. 생텍쥐페리의 강점은 자연을 묘사하는 것에 있다고 여겼는데, 그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특히 아들을 잃었을 때의 주느비에브의 심리 묘사! 막연한 모든 감정은 생텍쥐페리의 펜을 통해서 명료하게 정리된다. 과장이나 미화 없이도 ‘세계의 사실’은 아름답게 그려진다. 그가 세계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까. 자연과 인간. 인간과 사랑. 많은 책들이 주제로 삼고 있는 것들이지만, 생텍쥐페리가 이야기하는 자연, 인간, 그리고 사랑은 특히 더 낭만적이다. 총 평점 5점 만점에 4점.
1.
총 3부로 나누어져 있고, 1부와 3부는 베르니스의 비행에 관한 이야기, 2부는 베르니스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생텍쥐페리의 책이라 당연히 비행에 관한 내용들로만 이루어져 있겠거니 했는데, 뜬금 없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서 놀랐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그 사랑 이야기가 아주 탁월하다는 것.
솔직히 1, 2, 3부 중 2부의 사랑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었다. 단순히 흥미진진해서가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 묘사가 아플 정도로 명쾌해서이다. 특히 주느비에브의 심리 묘사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단번에 빠져들게 할 뿐만 아니라 무언가 뒤틀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어둡고 불쾌하고 괴로운 감정들. 그런 것들이 이렇게 글로 멀끔하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카타르시스를 말이다.
멀리서는 이런저런 상상을 하게 된다. 떠날 때는 애정을 남기고 가면서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만, 땅에 보물을 묻어 놓고 가는 것 같은 이상한 감정도 느낀다. 때로는 그렇게 도망치는 것이 인색한 사랑임을 반증해 주기도 한다. 별이 가득한 사하라에서 어느 날 밤, 그는 멀리 있는 따뜻한 애정, 밤으로 감싸이고 씨앗처럼 시간으로 감싸인 애정을 꿈꾸고 있던 차에 갑작스럽게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잠자는 모습을 보기 위해 좀 뒤로 물러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구부러진 지평선, 사막의 곡선을 앞에 두고, 그는 고장 난 비행기에 기대어 양치기처럼 자신의 사랑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런데 돌아와 보니 이렇구나!"
- 44p.
“주느비에브, 사랑 때문에 죽는다는 게 정말일까?”
너는 시를 중단하고 심각하게 생각해 보곤 했다. 너는 아마도 그 대답을 고사리들, 귀뚜라미들, 꿀벌들에게서 찾으려 했던 것 같고, 꿀벌들이 사랑 때문에 죽으므로 너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필연이었고 평화로웠다.
- 52p.
2.
1부와 3부의 내용도 좋기는 했지만, ‘인간의 대지’(생텍쥐페리)를 읽고 난 후 바로 읽어서인지 다른 작품들과 겹치는 묘사가 많은 것 같아 지루했다.
사실상 ‘남방우편기’가 가장 먼저 출간된 책이니 ‘인간의 대지’나 ‘야간비행’의 원류가 되는 소설이라고 해야 맞겠지만, 이 책을 가장 마지막에 읽게 된 나로서는 어딘가 어설프고 이후 소설들의 열화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처음에는 번역의 문제인 줄 알았다. 어투가 왔다갔다 하고 심지어는 비문도 있었으니까. 번역 누가 했냐, 하고 욕을 좀 하기도 했는데, 책을 다 읽고 마지막에 해설을 펼치고서야 이게 생텍쥐페리의 첫 책이라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번역가님께는 매우 쏘리.
“나는 어린아이처럼 절망에 빠지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온종일 울곤 했어요. 하지만 밤에 램프가 켜지자마자 그 친구를(신을) 다시 찾으러 가곤 했지요. 내 기도 속에서 친구에게 말하곤 했어요.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나는 너무 약해서 망쳐 버린 내 인생을 고치지 못해요. 하지만 당신에게 모든 것을 줄게요. 당신은 나보다 훨씬 강해요. 알아서 해결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고 나서는 잠들곤 했지요.”
- 59p.
훌륭한 해결법이다. 나도 어린 시절 나만의 친구(즉, 신)를 만들었어야 했다.
그가 거짓말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어떤 불안에 사로잡혀 혼자 괴로워할 수가 없어서 그 불안을 나누려는 거였다. 자기는 괴로운데 세상이 평화로운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거다.
- 61p.
3.
현학적이고 철학적인 비유들이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표현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다만 이후의 생텍쥐페리 책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라는 감상을 주는 것에 그런 표현들도 한몫을 했다.
예전에 내 소설을 보고, ‘통제적이다’라고 평가한 사람이 있다. 확실히 그렇다. 나는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독자들에게 명확하고 분명하게 전달하고 싶어하는 편이다. 일말의 헷갈릴 여지도 주지 않고 말이다. 그러다 보니 부연이 이리저리 길어지게 되는데, 이 책을 집필할 때의 생텍쥐페리도 그런 심리 하에 있었지 않나 싶다.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문장에 녹여내고 싶어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4.
그리고 ‘어린왕자’를 제외한 생텍쥐페리의 대표작들 모두에서 나타나는 ‘자연에, 그리고 스스로에 맞서는 인간의 의지.’ 그것이 이 책에서도 나타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이 원류일 것이다.)
하기사 작가 본인 스스로가 그런 모험심을 가지고 살았으니 비행을 했을 테고, 글에도 모험심에 대한 찬양을 담아 놓은 것일 테다.
그리고 자꾸 주인공들을 죽이는데, 미학적으로는 옳은 선택이지만 주인공의 사망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어딘가 안타까운 마음과 속상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심지어 ‘어린왕자’에서도 어린왕자를 죽였잖아.
거기서는 새벽이 큰 재앙을 하얗게 표백시키고 있음을 그녀는 느낀다 . 흐트러진 차가운 침대 시트. 가구 위에 내던져진 수건들, 쓰러진 의자. 그녀는 그 사물들의 와해에 얼른 맞서야 한다. 그 의자를, 그 꽃병을, 그 책을 서둘러 제자리에 끌어다 놓아야 한다. 삶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의 자세를 다시 잡아 놓는 일에다 헛되이 온 힘을 쏟아야 한다.
- 75~76p.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 도대체 어떤 말로 위로를 건네야 할까. 그러나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애도이자 배려일지도 모른다. 나의 명예를 위해 상대의 상처를 헤집을 필요는 없다. 또한 진정성이란 것은 증명해 내기가 매우 어렵기에⋯⋯.
사람들이 조문을 왔다. 그들은 말하기 전에 자세를 가다듬는다. 그녀 안에 있는 불쌍한 추억들을 자기네가 휘저어 놓고는 이어서 진정되도록 놔두는데, 그건 참으로 조심성 없는 침묵이다⋯⋯.
- 76p.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몸을 기울여 부드럽게 말한다. 그가 그녀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하는 그 자신의 이미지, 신이나 가질 법한 그런 애정을 그녀는 믿으려 애써 보고 싶다. 그녀는 사랑의 이미지를 사랑하고 싶어한다. 사랑을 수호하기 위해 그녀가 갖고 있는 거라곤 오직 그 빈약한 이미지뿐이니까⋯⋯.
오늘 밤 그녀는 관능 속에서 그 허약한 어깨, 그 허약한 은신처를 발견할 테고, 거기에 얼굴을 파묻으리라. 짐승이 죽으려 할 때 그러하듯이.
- 86~87p.
베르니스의 첫사랑 주느비에브. 책을 읽다 보면 주느비에브의 어깨를 그저 끌어안아 주고 싶어진다. 사랑과 생활은 비록 다른 것일지라도.
5.
개인적으로 모험심과는 벽을 쌓고 살아온 사람이라, 비행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비행이 낭만적인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책이 바로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이었다. 그 책은 생전 관심도 없던 비행에 부러움이라는 속성을 더해주었다.
그리고 이 책 ‘남방우편기’는 비행에 대한 지식욕을 더해준다. 좀 나쁘게 말하면 비행 관련된 설명이 어려웠다는 의미다. 딱히 전문 용어가 남발되고 하는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 어느 기항지에서 어느 기항지로 신호를 보내는 것인지, 그래서 지금 베르니스의 비행기가 어떤 상태라는 것인지가 잘 와닿지가 않았다. 이건 생소한 지명이나 과거와 현재를 왔다갔다 하는 서술 탓일 수도 있으나…… 비행에 대해 좀 더 잘 알았더라면 이해가 더 쉬웠을 거라는 생각은 여전하다.
6.
자꾸 ‘야간비행’과 비교하게 되는데, 어쩔 수 없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고, 경험도 재능도 생텍쥐페리보다 모두 부족한 내가 감히 평가할 자격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생텍쥐페리 작품 세계의 완성은 역시 ‘야간비행’이라는 생각이 계속 든다.
야간비행 읽으세요, 모두들. 야간비행. 그건 진짜 모든 문장이 심금을 울린다. ‘남방우편기는’ 열에 한 문장 정도 심금을 울린다 하겠다. (가혹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한 권을 통틀어 좋은 문장 하나 찾기도 어려운 책이 세상에는 훨씬 많지 않은가. 어쨌든 야간비행 읽으세요.)
베르니스, 네가 어느 날 나한테 고백했지.
“나는 인생을 썩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인생을 사랑했어. 완전히 충실치도 못했던 인생을⋯⋯. 내게 뭐가 필요한지도 그리 잘 알지 못했어. 그저 가벼운 갈망이었는데⋯⋯.”
- 176p.
7.
언젠가 나도 비행기를 조종해 봐야지, 하는 꿈은 겁이 많아서 자동차 면허도 안 따는 주제에 꾸기에는 가당치도 않다. 그래서 낭만은 낭만으로 남겨둘 예정이다.
다만 언젠가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가게 되는 날이 오면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생텍쥐페리의 책들을 떠올리겠다. 이 경우에 나는 조종사보다는, 그들이 옮겼던 우편물의 심정을 느껴야겠지만. 조종사의 낭만에 공감할 수 있는 우편물 정도면 꽤 괜찮은* 축이지 않은가? 언젠가 훌륭한 우편물이 되어 보이
겠다.
*고능이라는 단어를 썼으나 해당 단어가 혐오 단어라는 지적이 있어 수정한다. 반성하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