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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by SAndCac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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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인 감상평

‘완성’은 무엇인가. 우리는 ‘완성’을 왜 추구해야 하는가. 헤세 작품치고 철학적인 고민을 던지지 않는 작품은 없지만, <싯다르타>는 유독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이었다. ‘완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추구하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나지만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세 명의 완성자들(그리고 그 외 등장인물들)에게는 분명히 배울 점이 있다. 그들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든, 혹은 그들을 반면교사로 삼든 말이다. 또한 지금 시대에 요구되는 성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역시 고민할 만하다. 헤세의 심리 묘사와 내용 전개력은 뭐 말할 것도 없이 탁월하다. 문장에 쉼표와 대구가 많다는 점이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지만, 곧 익숙해진다. 그러면 헤세의 다른 작품들에서 보았던 ‘성장’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확인할 수 있다. <싯다르타>에서 제시한 완성자들은 내가 바라는 완성자의 상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세의 타고난 필력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1.

헤세가 썼던 다른 책들과 느낌이 많이 다르다. 단순히 배경이 동양이라서가 아니다. 문체 자체가 독특했다. 쉼표가 매우 많고 호흡이 강제되는 느낌이 들었다. 대구적인 표현 역시 많다. 딱히 초반 혹은 말기라고 규정되는 특정한 시기에 집필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런 특징이 두드러지는 것이 신기하다.

그러고 보면 헤세는 작품마다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 ‘주인공의 정신적인 성장’, 그리고 ’목가적인 분위기’를 제외하고는 공통점이라고 뽑을 게 딱히 없는 것 같다. 물론 그 ‘주인공의 성장’이 헤세를 대표하기는 하지만.

이번 작품도 싯다르타의 성장에 맞추어 읽으면 헤세의 느낌이 낙낙하지만 문체에 맞추어 읽으면 헤세라는 느낌을 찾기 어렵다. 주제보다 문장과 표현법을 더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으로서, 개인적으로는 ‘헤세 같지 않다’는 느낌이 좀 더 컸다. (헤세 책이라고 읽은 게 데미안, 크눌프, 클링조어, 싯다르타 이 네 권이니 비교군이 적어서 발생한 오류라고 한다면 겸허히 인정하겠다.)

도시를 지나다 아름답게 치장한 사람들을 볼 때면 그의 입은 멸시의 감정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장사꾼들이 장사하는 것을, 제후들이 사냥하러 가는 것을, 상을 당한 가족들이 고인을 에워싸고 통곡하는 것을, 창녀들이 몸을 파는 것을, 의사들이 병자들을 위하여 애쓰는 것을, 어머니들이 젖을 먹여 자식들을 달래는 것을 보았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그에게는 볼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었으니, 모든 것이 속임수투성이였고, 모든 것이 악취를, 모든 것이 지독한 거짓의 악취를 풍겼으며, 모든 것이 그럴싸하게 속여 마치 참뜻과 행복과 아름다움이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믿게 하였으며, 모든 것이 부패하여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든 것이 부패하여 있다는 것을 시인하려 들지 않았다. 세상은 쓴 맛이 났다. 인생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극심한 고통이었다.

- 27p.

작품 초반, 싯다르타는 독자들이 공감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상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바라본다. 싯다르타가 처음부터 완벽한 성인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제시해 줌과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완성된 존재’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2.

어떤 사람이 ‘완성된 사람’인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회적 가치에 부합하는 특성을 여럿 가지고 있는 사람을 완성된 사람으로 본다. 대부분 선량하고 희생적인 사람들이 그 분류에 속한다.

그러나 싯다르타, 혹은 이 작품에 나오는 다른 완성된 존재들은 그 일반적인 구분에 포함되지 않는다. ‘성장’은 헤세 작품을 늘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이지만, 그것이 꼭 ‘선한 사람’으로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싯다르타가 바라는 완성은 지극히 개인적인 완성으로 그는 마지막까지 친구에게조차 자신의 깨달음을 온전히 전해주지 않는다. (전해주지 못한다, 에 더 가까울 것이다.)

작품 전반에 깔린 불교적 색채(내가 알기로 개인의 해탈을 강조한다)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정의가 ‘완성된 존재’에 대한 답인지 따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다만 나는 헤세가 말하는 ‘완전한 인간’상에 마음이 가지는 않는다. (정말 단순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그들 모두가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고 목표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나 자신에 대하여서만, 오로지 나에 대해서만, 저는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고, 저는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고, 저는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우리 사문들은 자아로부터 해탈하는 길을 찾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당신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라면, 만약 그렇다면 저는 당신의 가르침을, 당신을 본받는 일을, 당신에 대한 저의 사랑을, 그리고 승려들의 교단을 저의 자아로 만들어, 저의 자아가 오로지 겉모습으로만, 오로지 거짓으로만 안식에 이르거나 해탈을 얻을 뿐, 실제로는 저의 자아가 계속 살아남고 커지는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 56p.

세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려는 성인이 있고, 오직 ‘자기’의 완성을 추구하는 성인이 있다. 나에게는 전자의 의미의 성인이 더 익숙하다. 불교의 세계관이 익숙하지 않은 탓일까? 혹은 좋은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남을 도와야 한다는 사회의 교육에 익숙해진 탓일까?

3.

싯다르타가 바라는 완성의 경지는 인간을 초월한 곳에 있다. 나의 이 싯다르타식 완성에 대한 아니꼬움은 일단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굳이…… 인간을 초월해야만 하는가?

다른 말로 바꾸면 이렇다: 인간으로, 혹은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대체 무엇이 나쁜가? 그것이 왜 ‘극복해야만 하는 무언가’인가? 싯다르타는 처음부터 인생에 관조적인 태도로 임한다. 중간에 싯다르타는 사유만이 답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인간적인 삶에 온전히 빠져들어 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그 속세로부터 빠져나와 다시 관조—내가 바라보기에는 일종의 우월감이다—적 태도를 회복한다. 세상의 단일성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난 이후에도 말이다.

시간, 공간, 그리고 만물의 단일성. 그것을 확인한 싯다르타는 길가의 돌멩이마저도 ‘돌멩이 그 자체’로 사랑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진정한 ‘사랑’인가? 도대체 돌맹이를 뭐 어떻게 얼마나 사랑(…)하는가? 만물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 이 정도는 일반인도 가질 수 있다. 나도 가끔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길가의 비둘기마저도 예뻐 보인다. 그러나 완성의 단계에 접어든 싯다르타가 하는 사랑이라면 그런 것과는 구분되는 사랑이어야 할 것이다.

4.

‘그’ 싯다르타가 하는 만물에 대한 사랑이 내게는 잘 와닿지 않았다. 물론 싯다르타가 작품 속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는 ‘말’이 가지는 한계 때문일 것이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깨달은 바를 남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고타마의 제자가 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말이 본질을 흐린다고 강조하는 싯다르타가 꽤나 말이 많다는 것이다.)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삶에 충실히 뛰어들어 온 힘을 다해 주변의 사랑할 만한 것들을 사랑하고, 미워할 만한 것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또 존경하는 나로서는 싯다르타가 딱히 본받을 만한 완성자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특히나 요즘 시국에는 말이다.)

예로부터 ‘성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인간성의 초월을 기본 속성으로 가진다고 묘사되어 왔으니, 싯다르타가 초월에 대한 욕구를 가진다고 그를 욕하려는 것은 아니다. 싯다르타가 성인이 아니다, 부도덕한 인물이다, 이런 주장을 하려는 것도 결코 아니다. 다만 나는 싯다르타처럼 세상 만물을 세상 만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하게 되고 싶지는 않다. 사랑할 만한 것만 사랑하고 싶다. (이기적인가? 나는 평생 성인은 못 될 모양이다. 만물을 사랑하는 사람보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좋고, 만물을 사랑하는 사람보다 대중, 그리고 민중을 사랑하는 사람이 좋다.)

5.

그래서인지 싯다르타의 다른 경험이나 고행, 혹은 깨달음보다, 싯다르타가 아들을 만나 겪게 되는 심리적 고통에 관한 장이 제일 인상 깊었고, 또 흥미로웠다. 그때도 싯다르타는 이미 거의 성자에 가까워진 상태였는데, 아들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온갖 인간적인 욕망에 흔들리게 된다. (이 아들이라는 놈이 아주 그냥 버릇이 없다.)

싯다르타 그 자신도 부모의 뜻을 (실질적으로) 거역하고 출가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인과응보가 불교의 원리 중 하나라는 게 이해가 된다. 싯다르타의 출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으면서도 결국 아들의 뜻을 존중해 준 싯다르타의 아버지가 어떻게 보면 이 작품에서 가장 인간다우면서도 고귀한 사람이지 않을까 싶은 느낌도 든다.

비슷한 의미에서 싯다르타가 속세의 탐욕에 빠져 스스로를 경멸하는 부분 역시 몰입도 있게 읽었다. 헤세의 심리 묘사를 내가 평가해 뭐하겠는가. 황금이 빛난다는 것은 굳이 입 아프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3.8이라는 점수는 솔직히 이 책의 주제보다는 헤세의 글솜씨에 준 점수이다.

그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의 욕구 때문에 부득이 그런 도박을 하였다. 사람을 비참할 정도로 괴롭히는 돈을 그렇게 도박으로 물쓰듯 탕진해 버리는 것이 그에게 노여움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그는 장사꾼들의 우상인 부에 대한 경멸감을 이보다 더 분명하고 냉소적으로 나타내 보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증오하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비웃으면서, 엄청난 판돈을 가차없이 걸고 도박을 하여 수천금을 몽땅 쓸어버리기도 하였고, 수천금을 모조리 날려버리기도 하였다. 그는 도박으로 돈을 잃기도 하고, 귀중품을 잃기도 하고, 시골의 별장을 잃기도 하였으며, 그것들을 다시 땄다가 또다시 잃기도 하였다. 그는 불안감, 그러니까 주사위 노름을 하는 동안, 그리고 막대한 판돈 때문에 걱정하는 동안 가슴을 죄는 듯한 두려운 불안감, 바로 그 불안감을 사랑하였으며, 그는 언제나 그 불안감을 새롭게 살려내려고 하였으며, 언제나 그 불안감을 고조시키려고 하였으며, 그 불안감이 주는 자극을 점점 더 높이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지겨울 정도로 물려버린 미지근하고 맥빠진 자신의 삶에서 그러한 감정 속에라도 빠져야만 그나마 자신이 행복 같은 어떤 것, 도취 같은 어떤 것, 고양된 삶 같은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116-117p.

6.

책을 읽으며 재미있었던 것은, 싯다르타의 사상에 독자가 끊임없이 의심을 던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냥 나만 의심하면서 읽었던 것일수도 있다.) 싯다르타가 결국에는 성인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의심인지도 모른다.

처음에 싯다르타의 사상은 완벽하지 않다. 속세의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오직 자기를 벗어나 해탈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거부감을 불러 일으킨다. 일반적으로 긍정적으로 인식되는 것, 의사가 환자를 살리기 위해 하는 노력이나 사랑 같은 것에도 부정적인 시선을 가져다 댔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책을 읽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싯다르타가 자신의 사상의 부족함을 깨닫고 성장한다. 그러나 이 성장도 완벽하지 않다. 그러면 또 나는 싯다르타의 사상의 허점을 찾아낸다. 그러면 또 몇 장 지나지 않아 싯다르타는 성장한다. 그런 과정을 몇 번 반복한다. 그리고 내가 찾아낸 허점을 싯다르타가 극복해내 버릴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 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7.

후반부에 싯다르타는 모든 사람(독자를 포함해서)이 인정할 만한 완성자가 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관조성, 시혜성을 가진 성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까.

별개로 주인공의 중간 성장 과정을 반면교사 삼아 ‘어떤 인간이 완전한 인간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전개 방식은 확실히 흥미로웠다. 비판할 구석을 찾아낼 때마다 ‘에이, 싯다르타 별 거 없네’하는 저열한 만족감을 선사하는데, 그것이 비록 순간일지라도 짜릿하기는 하다.

<싯다르타>에는 완성된 존재가 셋 나온다. 그 셋의 느낌이 다 다르다는 걸 보면 완성은 한 가지 길이 아니라고 헤세는 생각했던 듯하다. ‘완성’ 자체를 굳이 추구해야 하나 싶은 나로서는 셋 다 그리 호감만 가는 인물들이 아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어느 면에서는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에게서 배울 점은 배우고, 나만의 인간미를 좀 더해서, 완벽……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완벽 비스무리한 것을 추구하려고 하는 ‘좋은 사람’이 되어 보아야겠다. (노력하겠다.)
「나는 당신과 마찬가지니까. 당신도 사랑이라는 것을 하지 않잖아.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사랑을 하나의 기술로서 행할 수가 있겠어? 우리 같은 부류의 인간들은 아마도 사랑이라는 것을 할 수 없을 거야. 어린애 같은 사람들은 사랑을 할 수 있지. 그것이 바로 그들의 불가사의한 비밀이야」

- 110p

8.

개연성 측면에서 바라보면 상당히 짜임새가 좋다. 당연한 평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무렴 헤세인데. 그러나 내 말은 어떤 완결성이나 훌륭함을 떠나서 (일부러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개연성을 틀어 놓는 작품도 꽤 있으니까), 이야기의 전개가 쉽게, 그리고 아무런 걸림 없이 매끄럽게 펼쳐진다는 것이다.

복선의 회수 역시 완성도 있다. 예를 들면 헤세가 속세를 향해 갈 때 건넜던 강을 속세를 빠져나올 때 다시 되돌아 건넌다든가, 그 강에서 뱃사공 역할을 하며 사람들을 속세로 혹은 속세에서 밖으로 건네주는 일을 통해 중도를 찾아간다든가. 새로운 깨달음을 찾아 떠나는 길에 남겨두었던 (그러나 싯다르타는 그 존재를 몰랐던) 아들이 싯다르타의 정신적 완성의 마지막 고난이 된다든가 하는 것들.

상징이나 의미를 생각하며 읽어도, 그냥 전개 위주로 가볍게 읽어도 좋을 책이다.

9.

개인적으로 싯다르타가 크게 존경스럽지는 않지만, 이 책을 쓴 헤세는 다시 한번 더 존경하게 되었다. 어떤 작품을 글로 쓰려면, 특히나 어떤 인물의 심정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하려면 그것을 어느 정도 직접 경험한 적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싯다르타의 인생은 한 사람의 인생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번의 변화를 맞는다. 그 모든 순간을 다 생생하게 묘사하려면, 작가인 헤세 역시 그 모든 순간을 편린이나마 경험했어야 할 텐데, 그 지점에서 (헤세는 확실히 인간이므로) 작가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싯다르타의 초반 고행에서 묘사되는 자아에서의 도피, 중반부의 자기 경멸, 후반부의 아들에 대한 고뇌와 결국 찾아온 깨달음까지. 이 모든 것이 한 작가의 펜에서 탄생한 이야기라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인간의 성장 과정을 단지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아주 생생하게 적어냈다는 점에서 말이다.

헤세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약 일 년 반 정도의 자기 수련(?) 과정을 겪었다고 하는데, 일 년 반이나 작품을 쉬었다는 것도 대단하고, 고작 일 년 반만에 이런 깨달음들을 글로 정리해낼 수 있었던 것도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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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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