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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풍차

<폴란드의 풍차>, 장 지오노

by SAndCac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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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인 감상평

‘운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 고민을 하게 한다. ‘운명’은 어떻게 부여되는가. ‘운명’을 우리는 극복할 수 있는가. ‘죄를 지은 사람이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의 문법을 따르는 책이 아니라서 초반에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조금 헷갈릴 수 있다. 그러나 ‘뭐 말하고자 하는 바를 굳이 찾아야 하나’하는 심정으로 주제 찾기를 반쯤 포기하고 읽으면(?) 상당히 재미있게 읽힌다. 코스트 가에 얽힌 비극적인 사건들도 흥미롭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군중심리에 대한 묘사가 개인적으로는 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훌륭하냐면, 그래서 그 군중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혐오할 수 있게 된다. 운명을 딱히 믿지는 않지만, 주어진 환경에 대항하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경외 어린 시선으로 보게 된다. 프랑스 작가라 그런가 사카즘이 모든 문장에 녹아있다.


1.

책의 가장 앞부분에 가계도가 그려져 있다. 이 책이 어떤 내용인지, 어떤 인물들이 나오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음에도 가계도만 보고도 상당한 흥미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인물의 이름 아래 짤막하게 그 사람의 생이 어떻게 끝을 맺게 되었는지가 적혀 있는데, 대부분은 허무맹랑하거나 비극적인 죽음, 혹은 정신 병원 수감이다.

도대체 이 가족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기에? 그런 질문을 작품을 시작하기도 전에 가지게 만든다. 집안 내력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가? 정신병력이야 유전이라고 치자. 그런데 ‘사고를 잘 당함’ 같은 게 어떻게 유전이 될 수 있지? (최근 심리학 연구 결과를 살펴 보면 ‘위험에 쉽게 접근하는 특성’도 타고난 기질 중 하나로 설명하는 거 같기는 하지만,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위험을 굳이 찾아 들어가서 사고를 당한 게 아니라, 개인의 조심성과 상관 없이 운이 나빴다는 말 말고는 설명할 일이 없는 그런 사고다.)

가계도가 제일 처음 제시되어 있기에 가계도 말미에 적힌, 5대 혹은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나 했는데, 4대의 쥴리와 조세프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를 차지한다. 가계도 사진으로 보면 쥴리는 정신 착란, 이라는 문구 위의 칸에 자리하는 사람이고, 조세프는 쥴리의 남편이다.

<aside>

2.

화자는 이 ‘코스트 가문’의 일원이 아니다. 초반에는 ‘우리’로 자주 묘사되는데, ‘우리’는 코스트 가와 얽힌 그 지역 사람들이다. 어떠한 집단이 화자로서 등장하는 것이 꽤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진짜 집단이 화자인 것은 아니고, 실제 화자는 어떤 변호사다. 그러나 그는 중반까지 스스로에 대한 정보를 거의 주지 않고 단지 지역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으로만 등장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 우리는 조제프 씨의 직업이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이런 표현방식을 보면서 나는 화자가 ‘우리’라는 말 속에 스스로를 숨기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는 조제프 씨를 이렇게 판단했다’, ‘우리는 쥴리를 이렇게 판단했다’는 묘사들 속에 교묘하게 스스로를 감추고 그 의견을 집단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작품 속 등장하는 대상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대체로 선동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잔혹하다. 그리고 일관적이지 않고 상황에 따라 지나치게 쉽게 바뀐다. 그래서 독자는 화자에게 쉽게 정을 붙일 수 없고,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단순화하자면 그래서 대상이 좋다는 것인지 나쁘다는 것인지) 헷갈린다. 이 소설은 여러 방면으로 흥미롭지만, 이러한 서술 방식이 진입 장벽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모든 일이 분명해졌다. 하얀 나무로 된 식탁, 쇠침대, 돋을무늬를 넣어 짠 식탁보, 스스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가난 등등의 일 말이다. (가난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려면 꼭 권력이 있어야 할까?) 우리는 이해하고 있었다. 조제프 씨의 가난이란 기꺼이 받아들이고, 일부러 꾸민 가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가난이라고. 그의 정체를 우리의 원로인 드 K······ 씨가 간파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명백하게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을 씁스레하게 여기고 자신들을 탓하고 있었다.

- 18p.

서술상에 또 한 가지 눈에 들어오는 특징은 이름의 표기이다. 코스트 가의 일원은 이름으로, 그 외 사람들은 위의 ‘드 K······ 씨’처럼 불완전한 익명으로 표기된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이름 앞에 붙는 이 ‘드’는 귀족들의 이름 앞에 붙는 표지라고 한다.

3.

화자가 과장이 좀 있다. 그리고 유쾌하다. 그러나 코스트 가에 얽힌 이 비극적임을 가볍게 만들어주지는 않고, 희화화한다는 느낌이 든다. 좀 쓸데없이 비장하기도 한데, 상황과 조화되지 않는 비장미를 더함으로서 화자를 더 못 믿을 사람으로, 화자의 평가의 대상이 되는 코스트가 인물들을 더 안쓰럽고 연민을 받을 만한 사람으로 만든다.
아래의 묘사는 뭐 엄청난 사건에 대한 묘사가 아니다. 단순히 조제프 씨가 자신에게 추파를 던졌던 여자들을 (’우리’가 그런 것처럼 비웃거나 무시하지 않고) 관대하고 정중하게 대우했다는 사실을 두고 ‘혁명’을 운운한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만사가 그런 식으로 벌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엄청나게 중대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 세계를 산산조각 내는 일과 다름없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들 그리고 그 생각 위에 세워놓은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가 그토록 자주 말하는 혁명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 27p.

코스트를 분격시킨 것은 죽음이라기보다는 죽음이 다가올 때의 그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죽음은 언제나 느닷없이, 그리고 마치 북극광처럼 나타났다. 예외가 있다면, 붉고 극적이었다. 그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치 화약 상자 위를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사람 같았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는 화약이 폭발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튀어오르는 것을 보지나 않나 하고 기다렸다. 그는 사람이 악의를 갖고 운명을 대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것은 기다리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분격했다. 그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자기 딸들도 내부에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니 술에 물을 타면 희석이 되니까 이런 방법을 이 예외적인 운명에 적용함으로써 모름지기 그 농도를 약하게 만들 수 있을 법도 했다. 아내라 자기 남편과 흡사해지기 마련이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마 그렇게 하면 위험 없이 약한 포도주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칼을 들고 신에게 공격하는 것은 벽에 자기 머리를 들이받는 일과 다름없겠지만, 평범하게 산다면? 물론 속임수지만, 그래도 그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이 고장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는 우리 고장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다. <평범하게 밥이나 먹고 사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는 제 딸들이 그저 단순히 평범하게 밥이나 먹고 살았으면 했다.

- 40p.
코스트는 자신의 집안에 ‘운명의 저주’ 같은 것이 있다고 믿었다. 그도 그럴게, 아내와 두 아들이 모두 사고사로 죽었던 것이다. 그래서 두 딸만은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고, 자신의 집안 운명을 중화해 줄 튀지 않고 평범한 남자들, 즉 ‘신에게 잊혀진’ 남자들을 남편감으로 원했다. ‘저주’ 같은 건 없다고 믿는 나로서는 이 코스트의 불합리한 믿음을 CBT 기법으로 상담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4.

인물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 ‘어떤 사람이다’ 하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러시아 문학처럼 이름이 아주 헷갈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익숙하지 않은 어감의 이름이 꽤 등장하고 드 + 알파벳 익명 기법(?)을 자주 사용하고 있음에도 인물들끼리 혼동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각 인물의 특성이 강렬하기도 하고, 또 앞장에서 제시한 가계도 덕인 것 같기도 하다. 감초처럼 등장하는 인물이 몇 있는데, 코스트의 딸들(2대)에게 남편감을 찾아주며 이 가문과 인연을 맺게 된 매파 ‘오르탕스’의 인물상이 아주 흥미롭다.

오르탕스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운명에 도전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성격만 놓고 보자면 지나치게 호전적이고 또 지독한 구석이 있어서, 사랑할 만한 삶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호감이 간다. 집단 뒤에 숨어 타인의 비극을 일종의 연극처럼 소비하는 ‘우리’보다 차라리 덜 비겁하다고 느껴져서일까. 아니면 작품 속에서 모두가 운명에 패배를 맞이할 때, 그녀는 운명을 ‘학대’하려고 하기 때문일까. (결론적으로는 그녀 역시 좋지 못한 끝을 맞이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운명에 도전했다, 는 감상을 들게 한다.)

그녀는 물질적인 것을 멸시했다. 버터 수프와 물만 먹고 살면서 여전히 코스트가 살았던 시절에 입었던 낡아빠진 옷을 입고, 심지어는, 질서의 표시를 조롱하듯, 헌 옷에 오래된 인조 보석을 비스듬히 달고, 마디진 굵은 손가락에 커튼 고리를 끼는 계산되어 있는 유치함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것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확고하게 자신의 왕홀을 쥐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이 그녀가 사람들이 보아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관심을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다. 운명과 결혼한 그녀는 남자와 결혼했더라면 남편을 학대했을 것처럼 운명을 학대했다. 그녀는 운명의 용돈을 갂고, 그 자유를 부인했으며, 운명이 하는 일을 방해하고 그 기쁨을 망쳤으며, 등에가 황소에게 하듯, 운명을 자기 손아귀에 넣을 때까지 끊임없이 못살게 굴었다. 만일 우리가 <사랑하다>라는 동사에 그 일반적인 가치를 부여한다면 오르탕스 양은 그러한 의미에서 자크를 사랑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녀는 늙은 부르주아 여자가 저녁을 사랑하듯—이 성스러운 시간에 카페에 가는 남편에게 불평하기에 좋은 이유가 되기 때문에—자크를 사랑했다.

- 73p.

5.

운명이란 무엇일까. 운명이란 극복할 수 있는 것일까. 운명에 대한 나의 의견은 상당히 복잡하다. 흔히 말하는 ‘신이 내린 운명’ 같은 것은 믿지 않는다. (신은 믿지만. 모순적이라는 걸 알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심리학적 관점에서 인간이 어떤 특정한 기질을 타고난다고는 믿는다. 그리고 이 기질이 개인의 인생에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다. 일반적으로는 본성 대 양육이 5.5대 4.5로 개인의 인생에 관여한다지만, 내가 볼 때는 적어도 7 대 3이다. (자유의지에 대한 의견은 아직 명확히 확립되지 않았다.) 그 기질을 운명이라고 한다면 나는 운명을 믿는다.

이 작품은 후자가 아니라 전자의 의미에서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처음에 이 작품을 해석하기 어려웠던 것이, 내가 그런 의미의 운명을 믿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저 부여된 운명’이 아니라 어떤 필연적인 이유, 즉, 그런 비극을 맞이해야만 하는 ‘죄’ 같은 것이 비극 이전에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그런 것이 없다. 코스트 가가 왜 이런 비극을 당해야만 하는지가 설명되어 있지 않다.

「평범함이라는 것, 좋지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이봐요 당신은 그렇게 쉽게 거기에 도달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당신이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지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당신이 옳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기야 나도 이제껏 평범한 사람들에게서만 행복을 보아왔으니까요. 그렇지만 누구나 다 평범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런 것을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 41p.

6.

코스트 가가 지은 죄가 있어야 그들이 비극을 맞이하는 것이 마땅하고 통쾌한데, 작품을 읽는 내내 코스트 가가 불쌍하기만 하다. 그래서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일까를 한참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해설을 통해 어느 정도 답을 찾았다. 작가가 그리스 비극을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 아놔.

학부 시절 미학 수업을 들으며 아폴론적 질서니 디오니소스니적 질서니 하는 것들을 배웠던 거 같은데 솔직히 잘 기억은 안 난다. 다만 ‘끔찍한 일을 당할 만한 이유가 없는, 혹은 훌륭한’ 사람들이 그런 일을 맞이했을 때 안타까움이 극대화 되므로 비로소 ‘비극’이 완성된다는 설명이 언뜻 기억난다. 그리고 비극이 성행했을 당시 그리스는 상당히 풍요로웠다는 설명도 기억이 나는데, 왜 그랬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아무래도 조만간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어야 할 듯싶다.

어쨌든 그리스 비극의 형식을 본뜬 (이 작품에는 신의 분노 같은 것은 두드러지지 않지만) 작품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는 구석이 많다.

하지만 우리가 쥴리를 특별하게 취급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그녀에게 행하는 악한 짓을 우리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할 수 있으며 또 우리는 그런 일에 대해 책임 의식을 느끼지도 않는다. 우리를 가볍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 방식을 알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돌을 던져서도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사는 이유를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늘 <입으로 너그러움 운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너그럽게 사는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선 너그러움을 이루는 요소들을 자기 속에, 아니면 자기 주변에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 내부 속에서 너그러움을 이루는 요소들을 갖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단지 왜 그런가 하는 이유만을 말하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추구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다른 모든 사람보다도, 아니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다른 모든 사람처럼 덕목을 갖추기 전에 우리는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열에 아홉 번은 우리의 입을 채우기 위해선 남의 입을 털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체제 속에서 자기 내부에 너그러움을 이루는 요소들을 지니고 있는 자는 모름들이 약자들이 죽어야 하는 것처럼 굶어 죽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들 중 몇 가지 너그러움을 이루는 요소들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이런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서둘러 그러한 것들을 버렸다. 그렇지 않으면 자살하는 일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보존해 줄 수 있는 것을 향해 간다. 그것이 우리가 하는 것이다.

(중략)

우리가 겸손한 것은 부득이해서 그런 것이다. 우리의 기쁨은 소박하다. 누구보다도 먼저 우리는 그것을 유감스러워하며 우리의 기쁨이 보다 풍요해지기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대단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운 좋게 남을 사랑할 수 있고 후회 없이 남을 위해 피를 흘리고 괴로워할 수 있는 사람들은 남을 증오하는 데서 우리가 기쁨을 느낀다고 해서 우리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남을 증오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마음이 할 수 있는 (혹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기쁨이기 때문이다.

- 90 - 92p.

7.

보통 이 작품의 주제를 ‘운명에 대한 도전, 부르주아 비판’으로 뽑는다는데, 반 정도는 동의할 수 있고 반은 동의할 수 없다. 어떤 주제를 강력히 피력하려고 하는 작가의 작품에는 통제성이 묻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나는 아주 자유로운 의식으로 이야기를 탐험할 수 있었다.

그냥 작가가 이 작품을 쓰는 게 재미있어서 쓴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뭐 굳이 부르주아를 비판하고 운명에 대해 도전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가문을 설정하고 그들의 삶을 그리는 일 자체가 작가에게 즐거운 일이었기에 쓴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렇기에 화자의 발화가 때로 꼭 (좋아하는 분야 설명할 때 흥분해서 말을 막 쏟아내는(···) 우리네들처럼) 흥분한 것처럼 장황해지고, 과장되고 하는 것 아닐까······하는 추측을 좀 해 본다. 물론 작가가 평소 부르주아에 대한 비판적 생각과 운명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에 그것이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아난 것이겠지만, 어쨌든 그런 걸 꼭 독자에게 주입하려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다.

사실 장 지오노를 잘 몰라서 그가 작품의 주제와 주장을 중요시하는 작가였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냥 뭐 나의 무식을 잠깐 반성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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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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