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바왐바 - Tubthumping (1997)
할아버지는 생전 알아주는 애주가였다. 하지만 술고래나 고주망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항상 맨정신으로 귀가한 뒤 집에서 드셨고, 특히 주말에는 자식들과 손주들을 초대해 반주로 드시는 걸 좋아했다.
엄격한 훈장님 같은 할아버지한테서 미소를 발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손주들이 따라주는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면 어느새 할아버지의 껄껄 웃음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 내가 본 할아버지의 주사라곤 너털웃음이 전부였다.
할아버지는 80이 넘은 연세에도 직장에 나갔다. 젊은 사람들도 오르기 힘든 아파트 단지 비탈길을 매일 두 발로 오르내렸다. 그 에너지의 비결이 바로 한 잔의 술에 있지 않았나 싶다. 피로에 지친 몸을 치유하는 회복의 술 말이다. 회복의 술은 좋은 술이다. 왜냐면 쓰러진 자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반면 멀쩡한 사람도 쓰러뜨리는 건 나쁜 술이다.
술이 술인 건 매한가진데, 왜 후자는 나쁜 술이 되었을까? 마시는 자가 언제 잔에서 입을 떼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유독 나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픽픽 쓰러지고 아무데서나 잠들고 정신을 놓는다.
1970년대 펑크 록의 탄생과 함께 영국에서 번성한 아나키즘 사상은 1980년대 리즈Leeds 지역을 중심으로 한 아나코 펑크의 유행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 첨바왐바가 있었다.
본인들 스스로도 '아무 뜻 없다'고 밝힌 이 괴상한 이름의 록 밴드는 국내에서도 <Tubthumping>이라는 노래로 반짝인기를 끌었다. 밴드 이름이나 노래 제목을 아는 이는 드물었지만, 거리에서 <Tubthumping>이 흘러나오면 너도나도 "아, 이 노래!" 했다.
<Tubthumping>은 일견 "적셔!"를 외치는 권주가勸酒歌 같지만, 여기서 말하는 술은 쾌락과 무절제의 술이 아니다. 노조 탄압과 무자비한 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의 설움을 달래주는 술이다.
그리고 국민의 복지와 화합에는 무관심하고 그들끼리의 제로섬 게임만 조장하는 파괴적 정부에 맞서는 의기투합의 술이다. 그러므로 <Tubthumping>의 술은 좋은 술이다. 사람을 쓰러뜨리는 술이 아니라, 다시 일으키는 술이기 때문이다.
첨바왐바는 당시 영국 부총리인 존 프레스콧이 이런 좋은 술을 먹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철도원 아버지와 광부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본인도 노동자 출신이면서 리버풀 항만 노동자에 대한 탄압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결국 첨바왐바의 한 멤버가 사고를 쳤다. '1998 브릿 어워즈'에 참석한 프레스콧의 머리 위에 얼음물을 끼얹은 것이다.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프레스콧이 ‘적셔져야 할’ 방식이었던 것이다.
묵자는 시대에 드문 현인이었으나 음악을 비난하는 오류를 범했다. 당시 풍류에 빠졌다가 나라를 말아먹은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음악에는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특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자신을 취하게 만드는 걸 경계하고 거리를 둘 줄 아는 능력도 함께 있다. 그 능력을 게을리 쓰고 애꿎은 음악만 비난한다면, 야밤에 공원 벤치에서 잠들었다가 아침이 되자 눈이 부시다며 태양을 비난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우리는 ‘관우의 술’을 마셔야 한다. 화웅과의 결투를 앞둔 관우에게 파이팅하라고 뜨거운 술이 권혀졌지만, 그는 “적장의 목을 베어 온 다음 마시겠다”고 한 뒤 결국 이기고 돌아와 마셨다. 그것은 적당한 때와 양을 아는 술, 생전 할아버지가 드시던 ‘절제의 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