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는 핵심 키워드가 하나 숨어있다. 바로 ‘이름’이다.
주인공인 치히로는 10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인데, 부모님을 돼지로 만들어 볼모로 잡은 온천장의 악덕 주인 유바바와 노예 계약을 맺게 된다. 이때 유바바는 치히로의 이름을 자기 멋대로 센으로 바꿔 버린다. 감독도 이 장면에 특별한 인상을 남기고 싶었는지 계약서에 ‘치히로’라고 쓰인 잉크를 유바바가 마법으로 빨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름을 잃어버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참나를 잃어버리고 허구의 나로서 살게 되었다는 뜻이다. 인도 철학에선 참나를 아트만이라고 한다. 순수한 의식이란 뜻으로서 아트만은 우주의 근본 원리인 브라흐만을 토대로 존재한다. 반면 이름을 잃어버린 나는 ‘허구의 나’로서 에고라 칭한다. 에고는 가짜 세계를 뜻하는 마야를 기반으로 삼는다.
우리는 어떤가. 지금의 우리는 아트만으로 살고 있을까 아니면 에고로서 존재할까? 만일 전자에 해당한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언제나 ‘참나’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나도 참나이고, 너도 참나이고, 그 사람도 참나이다. 이때 나와 타인의 경계는 자연스럽게 허물어진다. 반면 같은 질문에 주민등록상의 이름을 대거나 학생, 회사원, 남편, 아내 등 사회적 역할을 언급한다면 당신은 에고로서 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애니메이션 세계로 돌아가 보자. 치히로는 이름을 잃어버렸지만, 온천장의 다른 직원들처럼 참나를 잃지는 않았다. 왜냐면 그의 곁에는 늘 하쿠라는 소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쿠는 사실 의인화된 ‘강의 신’이다. 치히로는 어릴 적 강에 빠져 죽을 뻔했는데, 이때 하쿠가 치히로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치히로 곁에 늘 하쿠가 있었다는 건, 마야 세계에 살면서도 치히로는 언제나 신이 자신의 편임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쿠의 “두려워하지 마. 난 항상 네 편이니까”라는 대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절반가량이 장기적 울분 상태, 즉 화병을 앓고 있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는 ‘경쟁 성과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라는 답이 가장 많았고, ‘타인의 판단이 기준이 되는 사회 분위기’가 그다음을 차지했다. 사실 이 두 개의 답은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 ‘나를 잃어버렸다’이다.
어릴 적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부모님 손에 이끌려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우린 자연스럽게 ‘경쟁 사회’라는 마야에 입성했다. 그러면서 그전까지는 ‘호기심 많은 아이’ ‘즐거운 아이’ ‘사랑받는 아이’였던 우리에게 ‘학생’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어버렸다. 그리고 그 이름은 계속해서 수험생, 입시생, 성인, 취준생, 근로자, 배우자, 부양자 등으로 바뀌어 갔다. 이때 개명은 단순히 이름의 바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이름에 따라오는 의무감, 책임감, 부담감을 함께 짊어졌다는 뜻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존재 그 자체로 사랑받는 아이’라는 참나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애초에 이름을 잃어버린 건 당신 잘못이 아니다. 치히로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이름을 잃어버린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치히로는 사랑하는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개명에 동의했다. 당신도 비슷한 이유로 그랬다.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한 번뿐인 소중한 삶을 그럴듯하게 살고 싶어서 매번 새로운 이름에 적응하려 노력해온 것이다.
한편 치히로는 비록 이름은 바뀌었지만 결코 참나를 잃진 않았다. 개명은 불가항력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참나를 잃지 않은 건 오롯이 치히로 본인의 의지였다. ‘나는 언제나 하쿠라는 신의 보호를 받는 존재’라는 걸 자각함으로써 말이다. 반면 우리는 어떤가? 살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그때그때 풀기 위해 술과 담배, SNS와 스마트폰에만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물론 때로는 그것이 진통제와 같은 효과를 내지만, 그에 의존하기만 하다 보면 우리는 중독되고 말 것이다. 중독의 본질은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야와 같은 외부세계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에고로서 존재하라고 명령한다. 이때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의 잠언은 곱씹어 볼 만하다. “인간한테서 빼앗을 수 없는 마지막 하나는, 삶을 대하는 그 사람의 태도이다.”
그렇다. 우리는 몸을 갖고 태어나 치열한 경쟁 사회에 내던져진 존재로, 이곳에서의 생존게임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그 게임에 임하는 우리의 태도를 말이다. 타인의 판단 기준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는 존재로 살 것인가,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 존재로 살 것인가. 그것은 오롯이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