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질머리가 아주 고약한 데가 있었다.
29살이 되던 2월에 결혼해, 33살 12월에 '쌍둥이'를 낳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늦은 시간도, 늦은 나이도 아니었다. 아니 '늦어 버린 시간' 이란 없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아기'를 끝없이 기다리던 시기였다. 당연히 올 줄 알았던 아이의 기다림이 길어지자 나는 점차 불안해지고 예민해져 갔다. 자연스럽게 찾아오지 않은 아이를 성급하게 기다리고 있었고, 아이를 갖기 위해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에너지를 쓰고 시간을 쓰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하면서 우울과 조급함으로 일상을 보냈다. 남편과 손을 잡고 걷다가도 배부른 여자나, 엄마 아빠 손을 붙들고 아장아장 걷고 있는 아이를 보거나, 갓난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가는 여자를 보면 내게는 없는 것이 마냥 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이만 있으면 '행복'만을 안고 살 줄 알았다. 온 세계를 '아기'에 집중시키니 아이를 가진 사람은 모두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니며 슬픔에 꼭꼭 잠겨 있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은 실의에 빠지고 우울에 빠진 나를 다독여 주었고, 자기는 아이가 없어도 괜찮다고, 너만 있어도 자기는 행복하다고- 다부진 목소리로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그의 고백이 고마운 것이 아닌, 너는 기다리지 않는 아기를 나만 원하는 거냐고- 서러운 감정에 복받쳐 소리를 질러 댔다. 남편과 단둘이 즐거울 수 있다가도 ‘아이' 생각만 하면 급격히 우울해지고 눈물이 올라오고 감정이 슬픔으로 치달았다.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려 보자고 스스로 되뇌다가도 한 달에 한번 임테기를 들고는 깊은 상실감에 휩싸인 채 꼼짝 않고 있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일이 벌어졌다.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온 저녁이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이 일을 두고 화가 난 나는 부정의 감정을 끌어안고 '끝'이라는 지점에 도달한 채 남편과 일방적인 부부싸움을 했다. 그를 앞에 두고 출처 없는 분노를 걷잡을 수 없이 폭발시키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는 없어도 된다는 거지!- 고함소리와 함께 내 오른손이 나도 모르게 올라가서 안방 유리문, 베란다로 이어진 얇은 유리문을 오른손 측면으로 내리 쳤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느낄 새 없이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다. 새끼손가락 밑으로 이어진 살점이 뜯겨 너덜거리는 내 손을 놀란 눈으로 내가 바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남편은 줄줄 틀어진 수도꼭지처럼 뿜어져 나오는 피를 수건으로 돌돌 말아 서둘러 나를 집 근처 병원으로 데려갔다. 늦은 시간이었던 탓에 응급실로 향했고, 당시 집 근처 큰 병원엔 내 손을 돌봐줄 전문의가 없었으며 피를 철철 흘리는 환자를 보고 시큰둥한 당직 근무자에 화가 난 남편은 '응급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수소문해 집에서 30~40분 떨어진 손, 발 절단 '전문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신경이 끊어진 손에서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구제불능인지 모르겠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나 눈물만 나왔다.
자정이 넘긴 시간에 호출을 받고 온 의사는 차마 볼 수 없는 너덜거리는 살점을 들추며 늘 있는 일이라는 듯 "근육도, 신경도, 힘줄도 모두 손상됐네요"라고 말하며 손에 박힌 유리 조각을 빼냈다. 남편을 만나고 온 의사는 수술실로 들어와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 놓고 보조 간호사와 의사와 대화를 주고받으며 시끌벅적하게 수술을 시작했다. 차가운 냉기가 도는 수술실에 누워 나한테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뒤늦은 후회를 해봤자 소용없는 눈물이 자꾸 쏟아졌다. 환자의 상태를 보호자에게 먼저 알린 사실을 의사로부터 들은 남편은 새벽에 중보기도를 요청하는 단체문자를 돌리고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기도를 했다고 했다. 정말 긴- 새벽이었다.
차례로 병원을 찾아온 가족과 친구, 교회...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라고 하나같이 물어왔다. 사람들에게 부부싸움을 하다 본인 스스로 유리문을 쳤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나와 남편은 단순히 넘어져서 일어난 운이 없었던 '사고'라고 둘러데며 2주가량을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붕대에 칭칭 감긴 손을 하고 왼손으로 밥을 먹고, 매일 병원으로 퇴근하는 남편이 머리를 감겨주고 '모두 잘될 거야' 말하는 사람들의 긍정의 말을 붙들고 그 겨울을 버텼다. 살면서 손 절단 전문 병원에 오게 되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런 생각들을 하며 손가락이 잘린 사람들의 모습을, 손이 잘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처음으로 보고 경험했다.
소독을 할 때마다 붕대에서 벗겨진 내 손을 쳐다보며 내가 한 행동이 무엇인지, 그 어리석은 행동의 결과물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고, 느꼈다. 오랜 시간 붕대에 감겨 있었던 탓에 오른손의 근육이 굳어져 퇴원을 하고서도 근육이 원래대로 돌아오도록 물리치료를 받았다. 물리치료사는 굳어 있는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만져주고 마사지해 주며 근육이 유연해지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틈틈이 물리치료사가 하는 대로 왼손으로 내 오른손을 만져 주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치료를 받으며 조급하고 다급했던 응어리들이 손과 함께 유연해지고 부드러워져 갔다.
언젠가 아들이 물어왔다.
"엄마, 엄마 손 왜 그래?"
나는 여전히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그냥 다쳤다고 다쳐서 꿰맸다고만 했다.
다행히 손은 2차 수술 없이 잘 아물었고, 그날의 흉터만 짙게 남긴 채 움직임에 지장 없게 돌아왔다.
흉터가 남은 손을 하고 남편과 불임 전문 '병원'을 찾았고, 여러 가지 검사를 하고, '인공수정' 준비를 했다. 불임 전문 병원은 그와 내가 올린 결혼식장이 있던 건물 그러니까 같은 건물에 위치하고 있었다. 병원을 찾을 때마다 매번 우리의 결혼식을 떠올리며 병원문을 열었다. '알 수 없는 인생'이라는 노랫말이 떠오를 정도로 인생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배란을 유도하는 약을 먹고 배란을 터트리는 주삿바늘을 오른손으로 잡고 배에 꽂으며 그만, 이제 멈추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편 말처럼 그냥, 아이 없이 둘이서 한 번 살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시술 후 병원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마음이 놀랍도록 편안했다.
이주 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담당의사에게 커피를 전달했다.
초음파를 통해 보이는 아기집은 무려 세 개였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박거렸다. 그렇게 안 오더니... 한꺼번에 세명의 아이가 동시에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세명을 동시에 키울 수 있을까 싶어- 기쁜 와중에도 근심이 묻어 나왔다. 얼마 뒤 셋 중에 한 아이가 피로 새어 나왔다. 마음이란 것이 이렇게도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고, 인간은 이토록이나 이기적이었다. 미안하면서도 다행인지도 모를 복잡한 마음이 왔다가 지나갔다. 두 명의 아이가 그렇게 봄날에 와 여름을 살고, 가을을 보내고 겨울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가진 내 둥이들 덕분에 나는 '부모'라는 타이틀을 얻었고, 그 타이틀은 가끔 무겁고 어렵기도 해 나는 여전히 구제불능인 상황에 놓이고 가끔씩 반성문을 쓴다. 아이들은 시간의 속도대로 자신이 가진 흐름대로 쑥쑥 커간다. 커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매번 어려운 순간을 예고 없이 맞닥뜨리게 되니까.
손에 난 흉터는 마치, 에덴동산에 놓인 선악과 같다. '명령'을 기억케 하는 나무.
오늘도 아이일로 자책감이 든 나에게 내게 네 아이가 어떻게 왔는지 기억케 하는 흉터.
아이들을 보며 만지작 거린 손에서 마음에서 저릿저릿 아려왔다.